제18강: 죽음 후에는 무엇이 옵니까?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인간의 죽음 이후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일 것이며, 가장 큰 충격은 자신의 죽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게 되면 어디로 가는지,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가장 비극적인 일일 것입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죽음 이후의 운명을 미리 알고 싶어 하지만, 죽음의 경계선을 완전히 넘어갔다고 되돌아온 사람의 보고가 없는 한, 이를 알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물리적으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장이다”고 말하는 것이 더 위안이 되고, 살아 있을 동안만이라도 잘 살기 바라는 것이 인간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자신의 사후에 관해 끊임없이 사색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유사 이래로 온갖 종류의 이론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전생을 보았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영혼을 만났다." 하는 온갖 소문들이 무성합니다. 그러나 사후의 삶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루터의 말대로, "어린이들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하듯이, 우리도 역시 영속하는 삶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르는 세계보다 아는 세계에 더 열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갖고 꿍꿍 앓으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제쳐놓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 너머의 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발동만도 아니고, 가능한 한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의 발산만도 아닙니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도 보이듯이, 미래를 알아야 현재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살다 죽는 것보다는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삶은 더욱 알찰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성서가 말하는 죽음의 본질과 영생의 길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제시된 ‘세 가지 모델’을 요약하고 평가함으로써, 어렴풋하게나마 올바른 성서적 영생관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1. 첫째는 '영혼의 불멸'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이론은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남는다"는 이론입니다. 영혼불멸에 대한 신념은 모든 종족과 종교에서 각양각색의 형태로 두루 퍼져 있고, 과학의 시대인 현재에도 대중의 신념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이 이론을 가장 정교하게 다듬어 전수시켜준사람은 바로 플라톤입니다. 그에 의하면 영혼은 전생에서 이미 존재하였고, 그래서 죽음 후에는 다시금 본래의 세계(이데아)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진, 선, 미와 같이 영원한 것을 인식하고 사모하는 것은 바로 출생 이전에 이 세계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선장과 배'의 모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장(영혼)은 한 배(육체)를 타기 전에도 이미 다른 배(육체)를 타고 있었습니다. 선장(영혼)은 배(육체) 안에 들어가 이를 조종합니다. 그러나 배(육체)가 파손되면, 선장(영혼)은 이를 떠나 다른 배(육신)를 타든, 타지 않든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영혼과 육체가 일시적으로 결합되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요소는 잠시 결합되었다가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썩지만, 영혼은 영원토록 불멸합니다.

성서는 영혼불멸을 거의 지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며, 인간은 본래 유한한 존재로 (흙에서 지음받아 흙으로 되돌아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쪼갤 수 없는 한 인간(全人)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혼불멸론이 지지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이론이 개인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이라는 데만 있지 않고, 육체와 자연적인 세상을 일시적이고 악하며 더러운 것으로 보아 경시하고 오직 영혼의 세계만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몸과 세상, 아니 현실 전체를 비관적으로 보는 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에도 의학적-심리학적으로 영혼-육체의 이원론은 지지받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심신일체(心身一體)적으로 살고 행동합니다. 심신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전인의 창조와 전인의 부활을 희망합니다. 사도신경도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고 말함으로써, 부활의 결과로서 영생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부활 이전에도, 이미 이생에서도 영생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성서본문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살아서 영생을 얻습니다(요한복음 3:16). 이것은 단지 미래의 약속의 보증만이 아니라, 지금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지 않거니와, 죽는다고 하더라도 산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죽어서도 어떻게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까? 성서는 이런 확신을 상세하게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서는 영혼만의 불멸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성서의 가르침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영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점차로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혼불멸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습니다. 즉 영혼은 원래부터 불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불멸성을 얻게 되었고, 사후의 영혼은 완전한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알몸처럼 새 옷(몸)을 덧입기까지 부활을 기다리며 안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나눌 수 없는 전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영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마치 그리스도인이 영혼불멸을 믿는 것처럼 오해가 생겨났고, 부활보다는 사후의 영혼세계를 더 동경하면서 이를 천국처럼 화려하게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잘못도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육체가 없는 인간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설령 육체와 분리된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H2O)이 수소(H)와 산소(O)로 분리되어도, 수소(H)와 산소(O)가 전혀 물이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없는 영혼'은 결국 '배를 떠난 선장'의 모델처럼 성서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인간이 육체적인 형태를 띠지 않고도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혹은 죽음 후의 영생의 가능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열린 자세로 늘 질문하게 해 줍니다. 영생은 지금부터, 그리고 죽음 속에서도 가능하다고 성서가 말하기 때문에, 이 이론은 계속 인간에게 설득력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 이론의 장점은 인간에게 영생의 확신을 준다는 것입니다.

 

2. 둘째는 하나님의 신신하심(기억)'입니다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앞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영혼불멸론을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특히 칼 바르트와 같은 학자는 이 이론이 이교적이고 미신적일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주장하고 교만하게 반항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이를 단호히 배격합니다. 그리고 영혼불멸론은 영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보지 않고 인간의 본질(도덕적-이성적 본질)로 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전인으로서 살다가, 전인으로서 죽습니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살다 죽습니다. 사후에 무덤 위로 날아다니는 영혼과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오직 지속하는 것이 있다면,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혹은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음악과 악보'의 모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음악(영혼 혹은 정신)은 애초에 인간의 물질(두뇌?)에서 나왔다가 또 다른 물질(악보)에 기록됩니다. 음악(영혼)은 오로지 작곡가의 육체를 통해서만 표현되고, 또 한 번 표현된 음악(영혼)도 다른 육체(악보)에 옮겨지지 않으면 영원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음악이 없는 악보가 없듯이, 악보가 없는 음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음악(영혼)은 오로지 악보(육체)와 하나가 됨으로써만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작곡가의 육체는 사라지지만, 그가 남긴 영혼(음악)은 악보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한 악보가 파손되기 전에 다른 악보나 레코드에 옮겨지면, 음악은 계속 남아 있게 됩니다.

이처럼 악보가 다른 매체(육체)를 거치면서 계속 남을 수가 있듯이, 인간의 육체가 파괴되어도 그의 정신은 하나님 안에서 계속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육체를 떠난 영혼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하나님)에 보존되는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육체의 형태를 갖지 않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인간은 아닙니다. 그는 전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녔던 모든 기억을 거두셔서 부활 때까지 보존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연속성 혹은 동일성은 부활까지 하나님에 의해 보증됩니다. 우리는 영혼불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기억에 의해서 죽음 속에서도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대체로 성서적이고 과학적입니다. 첫 번째 창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두 번째 창조(부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부활을 통한 영생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오래 죽어 있더라도, 순식간에 부활하면 마치 방금 전에 잠든 후에 깨어난 것처럼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이나 나중에 죽은 사람들이나 모두가 다 방금 전에 죽은 것처럼 홀연히 일어나기 때문에, 기간이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인간은 전적으로 한 인간으로서 살고 죽고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이론은 한 인간을 둘로 쪼개지도 않고, 또 쪼개었다가 다시 붙이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전인으로서 살고 죽고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인간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부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기억일 뿐이라는 생각은 일시적으로 영생을 단절시키거나 영생을 약화한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이론은 "혹시 기억만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으로서 영생할 가능성이 없는지?"에 대해서 늘 질문하게 합니다. 여하튼 이 이론은 성서에 가장 걸맞은 이론이고, 과학적인 현대인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됩니다.   

 

3. 셋째는 '죽음을 통과하는 부활'입니다

 첫 번째의 이론은 영생을 보증하지만, 영-육 이원론을 말하기 때문에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두 번째의 이론은 하나님의 신실과 기억의 영속성을 말하지만,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영생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이론은 주로 고대-중세교회의 이론이고, 두 번째의 이론은 주로 현대 개신교회의 이론입니다.

그런데 현대 카톨릭교회의 이론은 또 하나의 진기한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레사케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살고, 전적으로 죽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불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약속하는 영생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전 인간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마지막 때, 예수의 재림 때 한꺼번에 일어난다면, 옛날이나 오늘 죽는 사람들에겐 영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지금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생과 함께 오직 부활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영생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죽음 속에서 개인적으로 부활을 경험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번데기와 나비' 모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번데기 이전의 벌레처럼 번데기가 된 벌레도 나비로 부화하기까지는 전적으로 쪼갤 수 없는 한 생명체입니다. 그 벌레는 전적으로 한 생명체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는 번데기에서 껍질을 벗고 나비로 변화합니다. 이처럼 인간도 살고 죽는 순간까지 쪼갤 수 없는 한 인격체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육체라는 허물을 미련없이 지상에 남기지만, 육체를 버린 영혼으로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또 한번 전적으로 새로이 태어난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이 육체를 떠난 상태가 아니라, 옛 육체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부화-부활한) 상태입니다.

이 이론은 앞의 두 이론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린 이론입니다. 즉 이 이론은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전인으로서의 삶과 죽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죽음 후의 영생을 보증하기 위해서 개인적 부활을 통한 전인적 영생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이론은 전인적인 인간의 삶과 죽음을 강조하고, 동시에 죽음 후의 영생도 보증하는 장점을 지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말하는 종말의 '만인부활' 대신에 주장되는 '죽음 속의 개별적 부활'이라는 사상도 낯설거니와, 육체라는 껍질을 벗고 새롭게 부활하는 생명도 전통적인 영혼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이 이론은 과학적인 현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을 주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죽으면서 육체의 껍질을 남기는 새 생명으로의 부활’ 이론은 자칫 육체를 경시하게 만들지 모르며, 몸(육체)의 부활을 부인할 가능성도 생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것에 대해 신실한 분이시므로, 그 어떤 것도 결코 무(無) 가운데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만물을 전적으로 새롭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 이론은 인간의 전인성(全人性)과 단절없는 영생을 보증하기 때문에, "앞의 두 이론의 단점을 극복하는 대안의 가능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늘 열려 있게 만들어 줍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세 가지 모델(선장과 배, 음악과 악보, 번데기와 나비 모델)을 다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일어날 영생을 충분히 다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하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굳건히 믿으면서,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 출발임을 확신하면서, 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 이신건교수(서울신학대학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제17강: 종말은 어떻게 옵니까?

 

 이제 우리는 조직신학 강좌의 마지막 주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제 우주와 인생의 종말을 생각해 보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종말은 이처럼 늘 마지막에 가서야 생각할 필요가 있는 주제일까요? 물론 종말이 오기도 전에 미리 겁먹고 불안하게 살 필요는 없겠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철학자(스피노자)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동물처럼 맹목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인류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를 생각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우주 안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나 미래의 문제는 그야말로 나중에 가서야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로 인간은 평안하든 불안하든 상관없이 늘 미래를 생각합니다. 하물며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문명이 위기에 이르게 되면, 얼마나 자주 종말을 생각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의 미래가 이전보다 더 불확실해지고, 자연의 파괴가 가속도로 증가하는 오늘 날에 온갖 종류의 종말론이 유행하는 것을 볼 때, 올바른 종말관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시한부 종말론’이 한국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를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아예 종말론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도 “그런 소동이 언제 있었느냐?”라는 듯이 종말론에 무관심해져 버렸습니다. 교회조차 이러한 태도를 보이다가는, 또 언제 사이비 종말론이 일어나 사회와 교회를 흔들어 놓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강한 종말론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생겨났고, 그래서 어느 종교보다 더 강하게 종말론을 신앙과 생활의 근거와 목표, 활력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종말론(묵시문학)은 그리스도교의 어머니이다”는 케제만의 말은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참으로 그리고 철저히 종말론이 아닌 그리스도교는 전적으로, 참으로 그리고 철저히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 칼 바르트의 주장은 옳습니다. 종말론은 올바른 신학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입니다(몰트만). 교회가 ‘믿음으로 인한 의(義)’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면(루터), 믿음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의(義)’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종말론은 그리스도교의 운명 전체가 달려 있는 중요한 초석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는 왜 종말을 신앙하게 되었으며, 종말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까?

 

1. 첫째는 '창조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성서는 단지 개개인과 한 민족의 운명에 관해서만 말하지 않고, 창조와 역사의 기원과 의미, 목표를 가르칩니다. 성서적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만물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나 다른 권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계획과 목적을 가지신 전능한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래서 우주 만물은 맹목적인 우연에 내맡겨져 있지 않으며, 다른 신들이나 영웅적 인간들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또한 성서는 역사를 인간이나 다른 신들의 놀이마당으로 보지 않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장(場), 무대로 보았습니다. 역사의 힘과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攝理) 안에 있기에, 이 뜻을 잘 파악하고 이에 올바로 응답할 때에만, 인류는 복과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은 왕이시다" 혹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천국)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신앙을 가장 잘 요약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서에 나타나는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유일절대적인 주권을 믿고, 경험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종종 실제적 경험과 어긋나기가 쉬웠습니다. 특히 정의가 짓밟혀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고,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한 사람들에게 온갖 고난을 겪어도 하나님이 간섭하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세의 침략과 포로생활 등으로 집단적인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친히 역사에 들어오셔서 정의와 진실로 심판하시길 갈구했습니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편 96: 13).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강대국 바벨론을 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할 때, 그리고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여 기적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올 때,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온 백성과 우주 전체에 완전한 평화와 정의를 수립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고대하고, 이를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포로기 전후로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서 종말론적인 신앙이 크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스라엘의 고난이 더욱 더 커져감에 따라 종말에 대한 희망은 극도로 팽배하였고, 그래서 온갖 종류의 종말론적인 문헌(묵시문학)과 해방운동이 생겨나기에 이르렀습니다.    

 

2. 둘째는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말론적 신앙이 확산되는 가운데 몇몇 예언자들은 장차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임을 믿고, 그의 오심을 선포했습니다. 물론 모든 예언자들이 다같이 하나님을 대리하여 통치할 이상적인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을 했던 옛 왕이나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 다스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는 메시야가 올 것임을 힘차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政事)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無窮)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自今) 이후 영원토록 공평(公平)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6-7).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이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자일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이 나라를 가져온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에게 와서, "당신이 바로 장차 오실 그 자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도, 예수는 기적과 복음선포의 사실을 증거로 들어 이를 시인했습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마태복음 11:2-5)은 바로 종말에나 이루어질 사건이 현재 안으로 돌입해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종말적인 사건이 가장 생생하게 일어난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한 인간에게 일어난 우연한 기적이 아니라, 종말에 있으리라고 예언된 '만인의 부활'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린도전서 15:21)라고 했습니다. 만인의 부활은 예수의 재림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지만, 예수의 부활은 이를 미리 예시(豫示)하고 입증한 종말의 징조(徵兆)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셋째는 희망의 영, 성령' 때문입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역사개입, 그의 아들 메시야의 활동을 통해 일어나지만, 성령의 활동이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서도 그렇거니와, 종말사건 가운데서도 삼위 하나님은 함께 활동하십니다. 이미 말했듯이, 성령은 창조와 해방, 구원의 사건 가운데서 활동합니다. 그러나 특히 만물의 회복과 갱신을 가져다 주는 영인 성령은 마지막 시대에 강력히 활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힘차게 증거하고, 또 이를 앞당겼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악귀를 추방한 것은 바로 하늘의 악한 권세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태복음 12:28).

특히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살리는 영'인 성령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종말적인 사건의 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부활한 그리스도가 약속한 대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성령강림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 베드로는 구약성서의 예언자 요엘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특별한 활동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靈)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17-18).

 

장차 종말이 이루어지면, 인류와 우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성서는 여러 가지 사건을 말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들라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정의와 진실로 심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날을 '주의 날' 혹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이 날은 바로 '예수의 재림의 날'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시는 분, 아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지만, 시간 안에서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미래로부터 오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 앞의 우리의 시간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즉 하나님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들어오는 '미래의 힘'입니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시고, 그리고 언젠가 완전히 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오셨기에, 또 장차 오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은' 다 오지 않았으나 '이미' 가까이 온 종말론적 시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예수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사이의 시간, '중간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만, 주의 재림은 언제라도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우리는 늘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이에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종말 앞에 서 있습니다.

 2) 마지막 심판과 영생: 그리스도인들이 오래 전부터 고백해 온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종말은 만물의 최종적인 심판으로서 다가옵니다. 이것은 만물이 무르익을 때, 농부가 이를 거두기 위해 추수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인간이 삶이 이생뿐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참되게 사는 것이 아니라면, 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면, 참 되게 사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 영생이 없다면, 올바르고 참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헛되게 사는 셈이고, 속고 사는 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만약 악한 자의 죄악이 죽음으로 다 사라진다면, 그에게 죽음은 피난처가 되고, 실로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더 이상 죽은 자를 심판하지 못하고, 악인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 되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죽음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3) 새 창조: 요한은 밧모 섬에서 새 창조에 관한 거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요한계시록 21:3 - 5).

그리고 그는 새 세계의 여명 안에 있는 옛 세계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세계의 종말은 새로운 영생의 날입니다. 첫 창조처럼 만물의 새 창조도 흑암을 몰아내는 빛과 함께 시작합니다. 새 창조는 영원의 서광이요, 영속하는 창조, 끝없는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빛은 창조물을 비추고, 모든 생명체들을 따스하게 만들며, 그것들을 하나님의 활력으로 채웁니다. 그의 영원한 임재는 죽음이 갈라놓았던 것을 합쳐 놓습니다. 그리하여 창조물로부터 죽음, 흑암, 차가움과 혼돈이 사라져 버립니다. 인간과 동물, 땅 위의 피조물과 하늘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공동거처에서 이웃이 되고 한 식구가 됩니다(몰트만).

출처 : 이신건교수(서울신학대학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제16강: 교회는 무슨 일을 합니까?

 

무릇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활동을 통하여 드러나기 마련이듯이, 신앙도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교회도 활동을 통하여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깊은 산 속에 은둔하고 있는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바로 그래서 성서는 교회를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산 위의 마을(마태복음 5:13-14)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슨 활동을 합니까? 세 가지 관계에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1.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1) 예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7장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인간됨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과 사귐을 나누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기쁨과 영생을 보증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臨在)를 경험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 인간은 비단 거룩한 날 동안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의 삶은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상적 삶의 한복판에서 영광받길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영을 통하여 항상 세계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예배의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간 중의 한 날을 특별히 거룩한 날로 여기고 하나님의 더 깊은 임재 안으로 들어갑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마지막 날로서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하고 교제하고 기쁨을 누리도록 예비된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 날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날(주일)로 이전되었지만,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퇴색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일은 안식의 날이면서도 동시에 생명의 재탄생을 축하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축제일, 희망의 날입니다.

 2) 찬양: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주된 통로는 바로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면서 즐거이 노래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도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늘 갖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지만, 그들과는 달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무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져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사에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통회하는 마음과 기쁜 찬양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들이 무한히 열립니다. 상한 마음과 몸이 치유됩니다. 아울러 찬양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들은 다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간들 간의 깨어진 관계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어긋난 관계도 회복됩니다. 그리고 찬양 속에서는 천국의 비밀이 크게 열립니다. 왜냐하면 천국이야말로 사랑과 예배와 찬양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양 속에서 우리는 장차 올 천국을 미리 맛보고, 널리 전파합니다.

 3) 기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또 하나는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칼빈). 하나님은 자기에게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기 때문에(시편 145:18),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에(시편 121:4),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모범은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가끔 참조할 수 있는 여러 기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늘 따라야 할 기도의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중에 우리의 소원을 아뢰기 전에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현하는 통로입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물질적인 것(일용할 양식)과 사죄, 그리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리스도들인이 자신만을 위하여 비는 이기적인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제사장적인 백성이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위하여, 인류와 만물의 고통을 대변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이 늘 실천해야 할 행동이듯이, 실천적인 행동도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한 것도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몸으로 산 제사드리고, 생활로 기도드려야 합니다. 이럴 때에만, 우리의 기도는 공허한 주문이 되지 않고 생활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럴 때에만, 기도는 악한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맞선 효과적인 공격이 될 것입니다. 기도는 두 손을 맞잡고 세상에 대해 봉기하는 것입니다(바르트).        

 

2. 둘째는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1) 선교: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교회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선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지상명령인 선교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선교의 근거는 바로 바로 하나님의 의지 자체 안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듯이, 아들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3).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이처럼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선교의 도구일 따름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 사명을 외면하면,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해야 할 가치는 사라집니다.

 2) 사회비판: 악한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하나님과 화해된 교회는 악한 세상과 화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악한 세상과의 불화를 의미합니다”(몰트만). 교회는 세상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 세상 밖의 나라로 도피하는 방주가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누룩이요,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는 소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끝까지 거부하는 이 세상의 어둠의 세력을 지적하고 비판할 사명을 갖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그의 제자들은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악한 세상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사회비판이 많은 고난을 초래한다고 해서, 사회비판이 교회의 양적 성장에 해롭다고 해서, 만약 교회가 악한 사회를 비판하기를 주저한다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소용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좁은 길을 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난도 참 교회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루터). 그러므로 고난을 회피하기 위하여 악한 세력에 대해 침묵하고 이를 방조하고 이와 타협하는 교회는, 아무리 크게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참다운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역사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3) 사회봉사: 교회가 사회비판을 감행하는 것은 영웅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져서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희망에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비판이 무차별적인 공격이나 무조건적인 파괴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선한 사마리아인들을 발견하고 양육함으로써, 이들과 함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선한 사회, 아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진지하고도 열성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나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곳이라면, 이 땅에서도 정의가 가능합니다. 평화가 가능합니다. 사랑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에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앞당기기 위하여, 불의가 있는 곳에 정의를, 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성. 프랜시스) 퍼뜨리고 세우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교회는 가난하고 갇히고 헐벗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맞서서 싸우는 대안적(對岸的) 공동체만이 아니라, 세상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대안적(代案的) 공동체(로핑크)입니다.    

 

3. 셋째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관계'입니다

 1) 신학: 교회는 자신이 선포하고 가르치고 행해야 할 내용을 그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이 유산은 성서와 성서 주석, 신앙고백과 신앙변증, 교리적-실천적 해석 등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과거의 신앙유산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그리고 적합하게 전달해 줄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학의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교회는 한 기능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이 일은 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의 일이지만, 신학자들의 전뮤물만은 아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신학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신학연구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회는 전문적인 신학자들을 지원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교회는 신학을 통하여 자신을 올바로 세우고 보존하며, 또 잘못된 모습을 개혁할 수가 있습니다.

 2) 교육: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선교는 제자양육을 낳고, 또 제자양육은 선교를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과 신학은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는 교육적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교육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중의 하나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교육적 효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교회는 모범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친교: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귐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을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일어나는 ‘신앙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신앙과 생활의 유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사회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의 사귐은 세례로부터 시작되고, 성찬을 통하여 보존되고 강화되고 갱신됩니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이 사귐은 폐쇄적인 교회 안에만 제한되지 않고, 온 우주에까지 미칩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온 피조물의 사귐을 대변하고 실현합니다.       

 4) 설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의미에서만 예배는 또한 인간의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 성서에 증언되어 있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되지만, 인간의 증언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의 선포자를 세웁니다. 물론 누구나 성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사도적인 교회 안에서, 훈련된 설교자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권위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5) 상담: 교회는 곤궁에 처한 그리스도인들과 이웃들을 돌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도 주로 부름받은 목회자들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는 허약하여 깨어지고 상처입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안팎의 약한 지체들을 감싸주고, 격려하며,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6) 봉사: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가 있지만, 우리의 손을 통해서 일을 하시듯이, 우리도 이웃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주인이시만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우리도 서로 섬기고 나누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성큼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지배자나 주인이 아니라 종과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책은 오로지 섬김으로부터 생겨나고, 섬김을 목표로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지배하기 위해서 섬기지 않으며, 섬기기 위해서 지배하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책과 활동은 오직 하나님-섬김과 인간-섬김 안에서만 거룩한 진가를 발휘합니다.  


출처 : 이신건교수(서울신학대학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제15강: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에게는 언뜻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우리에게 교회란 바로 ‘교회당’(교회건물)을 뜻하는 말로 종종 이해됩니다. 나는 가끔 교회로부터 '교회론'에 관해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이 때마다 나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교회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를 말해 보라고 말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교회당’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교회라는 말은 교회당이라는 단어와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우리는 종종 교회당에 가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교회당은 교회의 필수적인 요소는 될지언정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닙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3세기가 되도록 독자적인 교회당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덜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혹심한 박해 속에서 여기저기로 피해다니면서 참된 신앙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교회당 다음으로 많이 응답하는 대답은 '예배드리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당, 교회건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건전한 대답입니다. 교회의 생활이 대개 예배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예배를 빼놓고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가 교회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배가 교회활동의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예배는 많은 교회활동 중의 한 부분일 따름입니다. 이것은 마치 심장이 인체의 필수적인 핵심기관이라고 하더라도, 인체는 심장 외에도 수많은 다른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러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먼저 '목회자'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 생각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거의 전적으로 목회자의 지도력에 의해서 설립, 유지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갖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목회자를 동일시하는 생각은 장점과 함께 단점도 갖고 있습니다. 즉 목회자 때문에 교회에 가거나 교회를 좋게 생각한다면, 바로 그와 똑같은 이유로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신앙인들의 모임, 사귐 혹은 공동체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생각할 때, 마치 교회의 창설자가 신앙적이고 사교적인 신앙인들인 양 착각이 일어나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인 모임, 사귐이 없다면, 분명히 교회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오늘 날에도 우리는 신앙적이고 사교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교회를 설립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상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인간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즉 교회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단지 사회적인 실체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실체입니다. 즉 교회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역사적인 활동(창조-해방-구원)에 의해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즉 교회는 같은 감정, 신앙, 신조, 교리,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이를 보호하고 계승하기 위해 모인 사회적 결사단체가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시고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산물입니다.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교회, 즉 친교 혹은 사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기원과 본질을 다시금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으로부터 이해해 보기로 하십시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사귐’이라고 불립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사명을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창세기 12:1-3).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이 세상 가운데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열매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도성(都城), 하나님의 나라를 찾는 백성,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곳을 찾아 유랑하는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나라는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너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으로 파고 들어오는 미래의 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거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하는 거울이요, 동터오는 그 나라의 여명(黎明)이요, 그 나라가 돌입해오는 최전방에서 하나님 편에서 악에 맞서 싸우는 게릴라 부대, 전위대(前衛隊)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이해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사랑과 희생의 능력으로써 교회를 통치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건립,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영역은 1.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도적 생활(마태복음 28: 18 이하), 2.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고린도전서 11,: 23 이하), 3.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사귀고 예배하는 형제-자매적 공동체(마태복음 18: 20) 4. 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마태 복음 25: 31 이하), 5.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으로써 충만해진 그분의 몸, 하나님의 대성전이 된 우주(골로새서, 에베소서)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사귐'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가 부르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 하나님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모으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 안의 사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그런데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은 은사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1. '선포의 은사'(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 2. '봉사의 은사'(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 3. '치리의 은사'(감독/장로).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심지어 고난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남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적 삶) 등도 은사로 인정됩니다. 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 즉 카리스마적 공동체입니다.


출처 : 이신건교수(서울신학대학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제14강: 성령은 무슨 일을 합니까?

 

앞장에서 우리는 "성령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도 역시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성령이 어떻게 활동하는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앞장에서 이미 말했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유와 초월성을 뜻하기 때문에, 성령이 하는 일을 인간이 제대로 파악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아무리 신통한 자라도 바람을 손으로 잡은 양 "이것이 바람이다"며 보여 줄 수 없듯이, 아무리 신령한 자라도 성령을 잡은 양 “성령을 보여주겠다”며 과시할 순 없습니다. 손에 붙잡힌 바람은 이미 바람이 아니듯이, 인간이 장악한 성령이라는 것도 전혀 성령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재주가 있는 자라도 날아가는 비둘기를 땅에서 잡을 수 없듯이, 아무리 능력이 있는 자라도 성령을 붙잡을 순 없습니다. 설령 재빠른 솜씨로 비둘기를 붙잡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손 안에서 주물림당하는 비둘기는 조종당하고 죽기 십상입니다. 인간이 붙잡았다고 하는 성령은 결국 자유한 영이 아니라 인간의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소유했다”고 과시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며, "영이라고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를 시험해야 합니다"(요한일서 4:1). 우리는 거짓의 영, 인간의 영, 세상의 영,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을 경계해야 하며, 말씀에 부합하지 않은 성령체험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활동에 입각하여 성령을 올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이 하는 일을 무엇입니까? 성령은 어떻게 활동합니까? 성령이 하는 일을 세 차원(창조, 해방, 구원)에서 살펴 보기로 합시다.

 

1. 성령은 '창조 활동'을 합니다  

성령은 무엇보다도 창조의 영으로 나타납니다. 5장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의 창조활동에는 영의 강력한 활동이 함께 했습니다. 즉 태초의 창조에 어머니와 같은 성령은 혼돈스러운 우주를 품고 생명을 창조하였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입김)으로도 생겨났습니다(시편 33:6).

인간의 생명도 역시 하나님의 입김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창세기 2:7). 그러기에 생명은 하나님의 영의 선물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능자의 기운 덕분으로 생명을 부여받았고, 생명을 누리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영 안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과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도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성되고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의 기운(영)을 거두시면, 언제라도 흙(티끌)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창조의 영인 성령은 단지 만물과 생명을 창조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창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또한 새 창조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황무지를 낙원으로 만들고(이사야 32: 15 이하, 44:3),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립니다(에스겔 37장). 하나님의 영이 내리면, 닫혔던 하늘이 열려서 메마른 땅도 생기를 되찾고, 생명체들도 원기를 회복합니다(요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운 자도 바로 성령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과 앞으로 죽을 우리도 성령 안에서 다시 살 것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영, 새 창조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계 안으로 가까이 왔고, 지금도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미래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미래를 앞당겨 오는 희망의 영인 성령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성령의 권능 가운데서 이미 병든 자가 치유되기 시작하고(마태복음 12:28), 죽음이 극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오고 있습니다"(요한복음 3:3 이하).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을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출생과정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났듯이, 또 다시 한번 성령의 자궁에서 태어나야 한다(重生)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출생은 ‘위로부터의 출생’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자는 이미 여기서 영생을 얻었고, 영생을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새 세계, 새 생명을 창조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시에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창조자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Veni, Creator Spiritus)

        

2. 성령은 '해방 활동'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의 영으로서 창조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자연적인 존재’인 것 못지 않게 창조세계와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회-구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성령은 잘못된 사회구조적인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활동합니다.

 1)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을 가장 괴롭힌 구조악의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군주적, 독재적 정치구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권을 평등하게 누리며 살도록 창조된 인간은 지배욕을 추구하고 온갖 권력의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에 의해 늘 굴종된 삶을 강요당합니다. 이 때에 성령은 이러한 구조악을 방관하지 않고 역사 안으로 개입하여,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하여 활동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7). 하나님의 영은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갇힌 자를 놓아줍니다(이사야 61:1-누가복음 4:18).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종은 진리로 공의를 베풀고, 공의를 세웁니다(이사야 42:1-4). 성령은 인간을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기게 하는 사귐의 영이기 때문에, 인간들 간의 진정한 사귐을 왜곡시키고 인간을 도구화-노예화하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지배를 철폐합니다.

 2) 또 하나의 구조악은 물질의 신을 섬기면서 빈익빈-부익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경제적 구조악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권력의 독점만이 아니라 물질의 독점도 철폐하기 위해 활동합니다. 자유의 영은 부자들을 물질적 탐욕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이사야 61:1-누가복음 4:18). 성령이 옴으로써 경제적 구조악이 무너진 가장 극명한 예는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은 결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매우 인상깊은 기적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집에서 떡을 떼며 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사도행전 2:44-46)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 불평등과 물질우상이 무너진다는 것은 바로 성령이 가장 강하게 활동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처럼 ‘강제적인 전체주의’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은총의 전체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또 하나의 구조악은 문화적 차별과 소외의 구조악입니다. 정치적 독재와 경제적 독점은 문화적 차별의 원인이요 그 결과이기도 합니다. 즉 독재자들과 부자들은 인종, 계급, 문화, 성(性)의 차이를 악용하여 독재와 독점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독재와 독점을 이용하여 계속적으로 차별을 재생산합니다. 그러나 한 성령으로 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 자들 가운데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28). ‘사랑의 영’이기도 한 성령은 이기적인 인간을 고립과 독선으로부터 해방시켜 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남을 위해 자신을 개방시켜 줌으로써, 남들의 고통과 기쁨에 연대하게 하며, 남들과의 사귐 안으로 인도합니다. 심지어 성령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성령의 최고 은사(선물)이라고 불립니다(고린도전서 13장).

 

3. 성령은 '구원 활동'을 합니다

 앞에서 성령이 창조와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일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성령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기도 하므로, 성령은 특히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격적으로 활동합니다.

 1) 중생(重生)의 영: 먼저 성령은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활동합니다. 육신과 자기 자신, 자신의 공적을 의지하는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닫혀 있는 인간입니다. 특히 정욕과 불신, 교만과 불순종으로 인해 죄에 빠진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이기성을 깨뜨릴 수 없으며, 죄짐(죄책)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약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마약을 끊을 수 없고, 죄의 결과로 감옥에 들어간 인간이 제 힘으로 자물쇠를 풀고 나올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오직 바깥으로부터, 위로부터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짐을 지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완고해진 인간은 스스로 이 은총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도리어 은총에 완강히 저항하고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럴수록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교만하게 되고, 또 그래서 더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폐쇄성과 교만이 깨뜨려지는 것은 오직 성령의 활동 때문입니다. 인간이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의 문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요한복음 3:5). 이처럼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성령이 인간 구원을 행하는 첫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성화(聖化)의 영: 성령은 단지 인간에게 신앙과 용서를 선사하는 영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과 정의로 충만한 삶,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영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단지 인간을 죄로부터 씻을 뿐만 아니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합니다(고린도전서 6:11).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다시 태어난 인간은 마치 방금 태어난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된 그는 이제부터 성숙해 가고 장성해 가야 합니다. 안팎으로부터 오는 죄의 힘과 싸워 승리할 수 있기 위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기 위해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는 늘 투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죄의 막강한 세력에 맞서 늘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곁에 와서 연약한 우리를 돕고, 우리가 기도할 힘조차 상실할 때에 우리 대신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며, 정의를 위해 겪게 되는 온갖 고난을 견디게 하며, 시련 중에서도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도록 북돋아 줍니다. 이처럼 성령은 거듭난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는 영, 성화의 영이기도 합니다.  

 3) 소명(召命)의 영: 성령은 단지 인간을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영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고 그 뜻을 실천하도록 돕는 영, 소명의 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삶과 거룩한 삶으로 부름받은 인간은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의 분량에 따라 온갖 은사들을 주어서, 하나님과 교회와 인간과 세계를 위해 섬기게 합니다. 성령이 주는 자유는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성령은 죄와 죄의 세력으로부터는 자유하게 하지만, 자유하게 된 인간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또 그와 함께 교회와 인간, 세계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가르친 진리를 이 세계 안에서 증거하고 실천하게 하고, 이를 통하여 이 세계가 늘 새롭게 창조되고 더욱 더 해방되고 더 욱 더 큰 구원을 이루는 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헌신, 봉사하게 합니다.

 4) 신유(神癒)의 영: 그리고 성령은 단지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돕고 상처를 치유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힘입게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고, 온갖 질병을 고쳤습니다(마태복음 12:28). 이러한 활동은 오늘 날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 계속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인간의 내면(마음)을 기쁨과 평화, 의미로 충만케 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외면(몸)을 더욱 온전케 함으로써, 현세에서 이미 영생을 미리 맛보게 합니다. 비록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주어지는 건강과 치유의 기적은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완전히 주지는 않지만, 이 기적은 장래에 있을 영생의 보증이 되고, 부활의 징조(徵兆)가 됩니다.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더욱 의롭게, 더욱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더욱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마태복음 5:48).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더욱 온전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영화: 榮化)로 나아갑니다(고린도후서 3:18).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영화로운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까지 늘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이러한 날까지 성령은 늘 우리와 함께 합니다.


출처 : 이신건교수(서울신학대학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제13강: 성령은 누구입니까?

 
다른 종교와 달리,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기원을 같이 하는 다른 종교와도 달리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4장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즉 한 분의 하나님은 아버지요, 아들이요 또한 성령으로 불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 주체로서 하나의 공동체, 사귐을 이루시는 신비한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세 주체로 나누다 보니, 종종 엉뚱한 오해와 착각이 생겨나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남자나 여자이기라도 하듯이, 그분을 성(性)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분은 남자나 여자는 아니지만 중성적인 물체도 아니고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남성이나 여성의 이메지(Image)나 상징(象徵)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마치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남성적인 두 주체와 성령이라는 여성적인 한 주체로 구성되어 있기나 하는 것처럼 은연 중에 착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남녀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듯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도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어떻게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더욱이 성령조차도 여성적인 이메지로 생각하기를 꺼리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조차 온통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즉 성령은 완전히 독자적이고 별난 주체이고,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완전히 독특하고 별난 존재라고 멸시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성령과 무관하거나 성령보다 더 높은 분인 것처럼 착각하며, 그래서 성령과 성령운동가들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물론 성령과 성령운동가들이 이처럼 무시당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없진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론을 올바르게 확립하기 위해 너무 오래 동안 이단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리다 보니, 성령에 대해 미처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리스도의 역할을 너무 높이려다 보니, 상대적으로 성령의 역할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운동가들이 자주 균형과 절제를 잃고 무분별해지거나 과격해지다 보니, 이들을 견제하거나 억누르는 동안에 교회가 제도적으로 너무 경직화되고, 신학도 너무 그리스도론에 치우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날에 이르러 신학과 교회 안팎에서 많은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성령을 너무 망각하고 무시한 것은 하나님과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스도인의 성령경험을 너무 백안시했으며, 그래서 신앙이 무기력증과 형식주의에 빠져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성령론을 올바르게 복권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성령은 과연 누구입니까?   

 

  1.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원래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한, 하나님과 무관한 어떤 마술적인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한복음 4:24). 교회 안에서 성령의 온갖 은사들을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하나님은 세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면서도 세상 가운데서 권능을 발하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 움직이는 신적인 실재였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만물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을 '바람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영(靈)'이라는 단어는 바로 바람과 호흡은 뜻하는 '루아흐’에서 파생했습니다. 루아흐는 출처와 방향을 알 수 없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힘, 혹은 호흡 속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힘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도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설명할 때, 성령을 바람과 같은 실재에 비유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8).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이시다"는 말이 무슨 뜻을 갖는지를 바람에 비유해서 설명해 봅시다.     

 1) 앞에서 예수가 말한 대로, 영은 바람과 같이 임의로 부는 실재입니다. 바람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자유(自由), 파악불가능성(把握不可能性), 불가시성(不可視性), 초월성(超越性)을 의미합니다. 그 분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면서도 만물을 너무나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조종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하시는 일은 거룩하면서도 기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까?(출애굽기 15:11).   

 2) 자유롭고 보이지 않는 바람도 사물을 움직입니다. “바람도 안 부는데 살랑살랑”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바람이 불지 않고 움직이는 무생물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물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움직이는데, 그 이유도 사실은 생물의 중심(본능과 마음)에서 나오는 바람(바람기?) 탓일 것입니다. 여하튼 안에서 나오든 밖에서 나오든, 바람은 뭔가를 움직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은밀하게 만물을 움직이는 영이십니다. 이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역동성(力動性)을 의미합니다. 특히 태풍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도 때로는 굉장한 에너지(活力)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영이 엄청난 창조적 에너지를 쏟아놓으셨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을 생성시킬 뿐만이 아니라 메마르고 죽은 것들도 소생시키는 힘입니다. 즉 영은 죽은 자들까지도 일으켜 세웁니다. 죽은 예수를 살리고 이미 죽거나 언젠가 죽을 인간을 다시 살릴 힘도 바로 성령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들고 죽어가는 피조물은 오늘도 “창조자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이 영이시다"는 말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인격성(人格性), 관계성(關係性), 개방성(開放性)에 있습니다. 물체는 공간과 시간에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특정한 상황에 매여 있습니다. 이런 물체는 쉽사리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기 어렵고, 그래서 대개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어디나 갈 수 있고, 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넘어서서 모든 것들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으실 수 있고, 그것들에게 자신을 개방하실 수 있으며, 그것들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얼굴을 지닌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은 인간에게로 얼굴을 돌리는 영, 인간을 깨우며 활동케 하는 영, 인간에게 힘을 주고 위로하는 영,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기도와 영감을 일으키는 영입니다. 이러한 영 속에서 하나님도 자신을 인간에게 열어 보이시고 알리시며 나누십니다.

 

  2.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일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도 역시 하나님과 무관한 또 하나의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빛에서 나온 빛)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역시 영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는 영이시다”(고린도후서 3:17)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령 가운데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활’은 바로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며,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엠마모로 향해 가던 길에 바로 이 ‘영으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처음부터 바로 성령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으며,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아가 시험받았으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있게 전파했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 창조의 기적을 행했으며, 성령 안에서 ‘아바’ 하나님과 기도했으며, 성령 안에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높이 들림받은 예수는 이제 성령을 보내며, 성령 가운데서 만물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은 온통 성령에 의해 침투되어 있고, 성령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은 '또 한 분의 하나님'입니다  

성령은 비단 하나님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일 뿐만 아니라 또 한 분의 신적인 존재, 주체 혹은 위격(位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하나님의 능력, 에너지로 생각하기는 쉬워도, 한 분의 신적인 주체로 생각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위격성(位格性)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위대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성령을 하나님과 아들 간의 사랑을 이어주는 ‘사랑의 끈’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삼위(三位) 하나님보다는 이위(二位) 하나님을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4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온전히 세 주체로 존재하시면서도 신비한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도 또 한 분의 하나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해야만, 삼위일체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은 성령을 ‘그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분’이라고 인격적인 용어로 부릅니다. 요한이 증거하는 성령은 주체적인 분으로서 활동하는 존재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고, 진리로 인도하며,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고 증거합니다(요한복음 14-15장). 그렇지만 요한만이 아니라 다른 증인들도 성령의 주체적인 활동을 증언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하고 가르치며, 우리를 감동시키고 깨닫게 하며,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을 속이고 훼방할 수 있으며, 욕되게 하고 슬프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서는 성령의 독자적인 속성과 활동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며, “창조자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진리의 영이여,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를 위로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출처 : 평신도눈높이신학(이신건/서울신학대학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제12강: 예수는 무슨 일을 합니까?

  

앞장에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단지 위대한 인간, 인류의 스승, 성현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자, 즉 하나님과 같은 자, 참 하나님으로도 신앙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즉 예수는 인간 앞에서 참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요, 하나님 앞에서 참 인간을 대변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 안으로 오신 참 하나님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낸 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서는 그가 단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자만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추상적인 표현만으로 예수를 파악하기는 너무나 모호하고 미흡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우리가 앞에 놓고 이렇게 저렇게 묘사할 수 있는 정적인 물체가 아니라,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움직이는 대상처럼 살아 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나 인간 등에 대해서와 꼭 마찬가지로 예수에 대해서도 그가 행한 일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인격, 존재는 바로 그의 임무, 활동을 통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임무를 행하는 자일까요? 그가 어떤 신분으로 살고 행동하고 죽었을까요? 비록 그의 활동과 신분을 몇 가지로 요약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신학자들은 대체로 그의 신분 혹은 임무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1. 예수는 '예언자'의 일을 합니다

 예수는 현저히 예언자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숱한 옛 예언자들처럼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을 자신의 주요 임무로 삼았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소명) 혹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이 위탁하셨다고 확신하는 말씀을 목숨을 걸고 선포합니다. 예수는 30여년 간의 사생활과 광야의 시험기간을 거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자신이 친히 가르친 기도문에서 말했듯이,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존재)이 온 땅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온 땅에 실현되는 것, 하나님의 뜻(마태의 표현)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통치, 주권)는 그가 먼저 구하고 두드리고 찾았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촉구한, 절대적이고도 유일무이한 헌신대상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 뜻대로 하나님이 왕(임금)으로 통치하신다는 말입니다. 옛적에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릴 때, 왕의 권한은 절대적이고 막강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행복만이 아니라 생명도 주고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전권을 휘둘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는 유일무이한 전능한 왕, 통치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종종 하나님의 나라를 왕(임금)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처럼 왕과 같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다른 왕(재물, 권력, 세상명예 등)을 섬기거나 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돌이켜서(회개하여)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예수는 가르쳤습니다. 오로지 이 나라의 백성이 될 때에만, 우리는 정의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받아들인 자에게는 사죄와 영생, 축복과 평화가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닮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탁월하게 다른 점도 갖고 있습니다. 즉 옛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장차 혹은 가까운 미래에 올 것이라고 예고하고 열망하면서 이를 미리 가리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예수는 그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고 현재적인 성취의 열정 속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 멀리 어디엔가 있거나, 손에 잡힐 듯 안 잡힐 듯 모호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이미 우리 가운데 왔고 자라고 있으며, 실로 무르익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모습으로, 땅 속에 묻힌 보물이나 바다 속의 고기와 같이 우리 주위에서 이미 존재하며 활동하기 시작하고 있으니, 속히 결단하고 이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가 옛 예언자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은 그 나라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그의 활동과 운명 안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격으로 온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구체화되고 실현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말하는 전령(傳令)일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 소식입니다. 그의 행동, 특히 죄인의 용서(하나님의 권한)와 치유, 기적과 악귀추방, 죄인들과의 식탁사귐, 예루살렘 입성(왕의 등극), 마지막 만찬(천국잔치의 예시)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장차 있을 영광 중의 재림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안에서, 예수의 모습과 인격으로 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단지 선포하는 예언자만이 아니라 성취하고 실현하는 예언자입니다. 아니 그는 단지 스승과 예언자, 종교 지도자의 권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는 자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탁월한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예수만이 인류의 소망과 기쁨이며, 인류를 온갖 거짓과 기만에서 구원해 줄 참 예언자, 인류의 빛, 진리의 증인입니다.    

 

2. 예수는 '제사장'의 일을 합니다  

예수는 예언자일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지고 죽은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이면서, 동시에 친히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바친 대제사장(히브리서 9:11-12, 28)입니다. 예수가 인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영광과 사랑과 생명이 충만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이를 깨닫지 못했고,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요한복음 1:5, 11). 아니 어둠은 빛을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는 자기의 땅에 왔지만 마치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고, 끝내는 자기 땅에서 자기 백성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활동의 초기부터 의(義)로 인하여 박해받을 것을 각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아니 바로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미 예수의 탄생 자체가 하나님의 자기포기, 자기희생의 첫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탄생할 때 많은 갓난아기가 죽임을 당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과 권능 중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덮개 아래서, 고난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의 생애도 바로 고난과 가난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낮추셨고 권능을 비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옛 왕조시대의 많은 왕들처럼 무력으로 인간을 복종시키셨다고 한다면, 인간의 몸은 정복하실 수는 있었겠지만 인간의 영혼은 지배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무력의 방법은 인간을 참으로 구원할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배와 정복의 길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강요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견딥니다. 사랑은 악을 이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보복하고 인간의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인간의 고통을 지는 길을 택하심으로써, 영원한 사랑의 승리를 가져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희생당하심으로써 승리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범한 죄는 비단 죄를 범한 자에게만이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크나큰 상처를 남깁니다. 가해자는 죄책감을 갖고, 피해자는 보복심을 갖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상실합니다. 만약 누군가 죄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죄의 파멸적인 힘은 악순환 속에서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희생과 상처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가해자의 죄책은 해결되어야 하고, 그는 용서받아야 합니다. 피해자의 보복은 억제되어야 하고, 그의 상처도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속죄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답시고 인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죄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같이 가해자요 피해자인 인간이 죄인인 인간을 구원할 도리는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하고 하나님과 화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도 용서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성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성전에 나아가 속죄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제도를 창안한 자는 하나님이었고, 인간의 사죄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준 자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처럼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속죄제물을 하나님에게 갖다 바쳤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과 능동적으로 화해하신 분이지, 인간이 바친 제물 때문에 마음이 돌아서서 인간과 화해되신 분이 아닙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를 화목제물로 삼기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화해되는 분이 아니라 화해하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친히 인류의 고난의 짐을 지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1서 4:10).

그의 희생적인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하여 친히 자신을 제물로 삼은 거룩한 제사장의 죽음입니다. 그는 ‘심판당한 심판자’(K. Barth)로서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교만과 타락에 빠진 인간을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해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들 간에도 화해와 평화의 길을 터놓은 제사장입니다.

      

3. 예수는 '왕'의 일을 합니다  

예수를 왕이라고 부를 때, 앞에서 말한 대로 그의 통치가 무력과 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왔습니다. 그는 정의와 사랑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정의와 사랑 가운데서 편만해진다는 것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인격으로 온 그 자신이 바로 정의와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평화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도, 그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무장한 군인을 통솔하고 진군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평화의 왕의 모습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는 로마가 무력통치로써 이룩하려다가 실패한 평화(Pax Romana)를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이룩하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곳마다, 그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그의 의와 사랑이 지배합니다(Pax Christi). 왜냐하면 그는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며, 바로 그리함으로써 폭력과 억압을 행사하는 악한 제도와 권력에 맞서 저항할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아부하는 자는 잠시는 잘 사는 것같지만 결국에는 악의 종으로서 멸망합니다. 악에 대해 침묵하는 자는 잠시는 평안한 것같지만 양심과 하나님의 문책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악에 맞서서 저항하는 자는 쉽사리 악의 폭압적인 희생물이 됩니다. 이로써 그는 악의 실체를 드러내고 폭로하지만, 만인 앞에서 실패하는 자처럼 죽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희생은 결국에는 악한 자를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기는 힘이 되고, 급기야는 악한 자까지도 구원하는 대속적 희생이 됨으로써, 바로 악에 이기는 승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숱한 의인의 죽음처럼 예수의 죽음도 바로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불의는 정의를 영원히 이기지 못하며, 악한 자는 희생자의 무덤 위에서 영원히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최후의 원수인 죽음으로부터 부활함으로써, 예수는 죽음마저 영원히 정복한 진정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강력한 왕도 죽음을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진시황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죽인 생명의 주님, 왕 중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를 따르고 믿는 자들도 영원히 사는 왕적인 인간이 됩니다. 나태와 비참 가운데 있는 거지와 같은 인간이 왕과 같이 존엄하고 거룩한 자로 변모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통치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적인 통치는 이 세상에서는 아직 다 성취되지 않았고, 아직은 여전히 실패의 그늘 아래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다시 올 때면, 그는 온 세계의 왕으로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그의 자녀들은 그의 손에 이끌려 영광에서 영광으로, 빛에서 빛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모두가 주인이 되고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는 그런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예수는 지금도 평화의 왕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와 심판자로서 진정 만물의 왕, 왕 중의 왕입니다.


출처 : 평신도눈높이신학(이신건/서울신학대학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성경/선교/신학이야기 > 성경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BCJC 심화묵상 [하박국] 제2주차 과제  (0) 2011/09/16
QT 바로알기  (0) 2011/05/14
[성경Q&A] 사도신경은 무엇입니까?  (0) 2011/05/07
출애굽이야기 9  (0) 2011/04/09
출애굽이야기 8  (0) 2011/04/03
출애굽이야기 7  (0) 2011/04/03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재난 이후 5개월이 지났지만

일본에서 !

주님의 놀라우신 이름으로 문안 드립니다.

늘 저희 가정을 기억하시며 기도와 물질로 함께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더운 여름과 폭우 속에 교회와 가정은 안녕하신지요. 저희 가정은 주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기도로 늘 감사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금년 상반기를 뒤돌아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한 해의 반을 보냈습니다. 특히, 311일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관심과 기도의 때는 없을 정도로 조국과 세계각지의 형제, 자매님들께서 격려와 위로의 전화와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물질로도 한국에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지원헌금을 해주시고 일본을 위해 기도해주심을 강하게 느끼는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지금 일본은 기도와 서로 섬김으로 나라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진과 쯔나미 즉후 후꾸시마현 이와끼시를 방문해 배식활동을 지원하고 짧게 말씀을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후 주1회 정도의 패턴으로 피해지역을 방문하여 지원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크리스천 뮤지션들이 마음을 합하여 [사랑과 희망의 음악회] 라는 이름으로 일본전국과 한국을 오가며 피해지 지원 자선 콘서트를 진행 중 이며 함께 곡을 제공받아 CD도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습니다. 헌금 모금 액 약 1500만엔 정도를 목표로 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대의 피해지역인 미야끼현의 센다이시와 이시노마끼시도 방문하여 작지만 지원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일본의 많은 한인교회 교우들이 한국으로 귀국하며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인교회 동경장로교회가 대다수의 교인들의 귀국으로 인해 교회운영(목회자사례와 임대료지불곤란)이 어려운 관계로 목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18년간 일본인을 대상으로 일본인목회를 해온 입장에서는 선뜻 응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물질이나 하나님의 응답보다는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뜻하지 않게 맡게 되었습니다. 동경장로교회 성도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순종적이며 좋은 분들 입니다. 마음에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이국 땅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외로움도 지니고 있습니다. 저희 가정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까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치료가 성도들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배워가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구하며 겸손히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 부탁 드립니다. 저희 가정의 선교편지의 이름을 일본선교 19년 만에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JESUS DISCIPLES MOVEMENT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거룩히 수행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년부터 오랜 시간 함께 동역해 오던 일본복음선교회(이하, JEM)의 이사로써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외부 멤버로 지원하며 동역하였지만 이제는 한 가족으로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JEM을 위해서도 강한 기도 부탁 드립니다.

저희 가정의 임미정 선교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찬양사역과 사모의 역할을 병행하며 하나님과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으며 선교사역을 겸손히 아주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경장로교회 오면서 예전 일본인 사역 때 보다 사모의 역할이 커져 조금은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건강을 위하여 기도 해주세요. 제 아내가 건강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건 하나님 손해시거든요. 그리고 너무나도 귀하고 사랑스러운 딸 안나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멋진 언니로 누나로 동생으로 딸로 사역자로 아주 잘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다마가와 세이가꾸인(玉川聖學院)이라는 미션학교입니다. 아주 복음주의적이 학교입니다. 좋은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 물론 전교생이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안나는 특차이지만 사립학교이기에 다른 친구들은 시험을 통해서 선발되어 실력들이 월등합니다. 역시, 안나에게는 한국에서의 3년의 공백으로 인해 한자에 큰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학기 중에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로 과제하는 속도가 느립니다.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역시 초등학교 때 보다는 더합니다. 그리고 학교 서클활동으로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즐겁게 서클활동을 합니다. 3개월 만에 학교에서도 음악하면 박안나가 늘 거론될 정도로 인정받기 시작해서 안나에게 많은 격려가 됩니다. 얼마 전에는 교내 합창경연대회에서 안나가 지휘자로 참가해 안나네 반이 우승을 했습니다. 반주자가 가장 약한 반이었는데 반 친구들이 안나의 지휘를 잘 따라와서 우승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안나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 드립니다.

[기도제목]

1. 박종필목사가 영육간에 강건하므로 동경장로교회 교우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특히,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섬세히 섬기며 기도하도록.

2. 3기 사역의 비전대로 유학생을 잘 양육하여 일본인 젊은이들 주께로 인도하는 사역에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3. 지금 몽골자매와 일본형제가 세례반에서 성경공부중인데 끝까지 잘 마칠 수 있도록.

4. 한국에 있는 부천가족과 행당동가족을 위하여 부모님들의 연세가 70을 넘으셨습니다.

건강을 잘 유지하실 수 있도록.

5. 선교사가족의 건강과 영적인 일치를 위하여.

2011 9월 일본에서 박종필, 임미정, 박안나

========================================

Add: #3B 2-9-7 YURIKAOKA ASAOKU KAWASAKISI KANAKAWAKEN 215-0011 JAPAN

TEL/FAX +81-44-571-2475 * 후원구좌 외환은행 123-18-19487-2 예금주 박종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



2011 아가페초원 아웃리치 사진모음
2011 bcjc 아가페초원 영월신광교회 OUTREACH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