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10월 우리교회에서는 영적고전읽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첫 시간으로 C.S. 루이스의 책들을 읽고 나누는 작업을 했는데요.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영적 선배들의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루이스의 책을 소개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뭐니뭐니해도 그의 대표작이면서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서로 불리는 [순전한 기독교]입니다.

루이스의 책 작업은 상당히 보편적 수준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풀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특별히 좋습니다.
여러분의 의문과 교리의 모호성을 잘 설명하고 있는 저자와 한번 기독교의 출발을 공부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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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힐먼의 <하나님의 타이밍>은 '당신을 들어 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준비 과정'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고난 중에 있는 이들, 낙심과 절망,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낙심해 있는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 메시지다. 

저자는 자신이 고난 겪는 가운데 용기를 얻고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고 들어 쓰셨던 체험을 들려준다. 왜 블랙홀과 같은 고난이 있는지 그 광야의 때를 어떻게 지나야 하는지, 저자 자신이 통과했던 역경과 이것으로부터 배운 소중한 가치를 들려준다. 광야는 특별한 장소다.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드바아르(midbaar)'로 이는 '말하다'는 뜻인 '다 바아르(dahbaar)'에서 온 말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요셉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의 사람들이었다. 시련의 와중에도 하나님은 늘 함께하고 계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분의 관점에서 역경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역경을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요셉 소명'이다. 13년간 요셉은 배신과 학대, 종살이, 억울한 일, 투옥과 이별 등 온갖 역경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시련의 막바지에 이르러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었던 것을 상기시킨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갈피갈피마다 저자 자신의 역경의 시간, 그 7년간의 역경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요셉이 긴 역경을 딛고 우뚝 섰던 것처럼 저자 자신이 또한 역경을 딛고 일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었듯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모두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경을 바라보고 낙망치 말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말한다. 역경의 시간은 무의미의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부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라고. 

책은 ,
제1부 '나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표', 
2부 '지도자를 위한 테스트', 
3부 '그래도 계속 걷는 믿음', 
4부 '모험을 위한 힘찬 준비'
로 크게 구성되었으며 14장으로 되었다. '나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표(1부)'는 요셉 소명, 하나님의 방식이 어떠한지, 블랙홀과 광야 경험을 어떻게 움직여 가는지를, '지도자를 위한 테스트(2부)'에서는 지도자가 받는 테스트, 유다 시험, 성실성 시험, 인내 시험, 성공 시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도 계속 걷는 믿음(3부)'에서는 '선한 사람의 고난(욥의 경우)'을 들어 선한 사람이란 아무도 없다고 또한 역경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것과 우리가 깨어 있어 내면의 영적 요새를 어떻게 타파할지를 말한다. '모험을 위한 힘찬 준비(4부)'에서는 역경을 뒤집고 실패를 정면 돌파하고 요셉 소명을 완수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지저귀는 새는 노래하는 법을 어둠 속에서 배운다"고 했고 "만일 당신 자신이 다른 이에게 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칠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밝은 곳으로 돌아간 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할 귀한 메시지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실 것이다(61쪽)"고 말했다. 그는 또 "블랙홀을 보는 한 가지 방법 그것은 '정체성을 명확히 해 주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결정적인 순간은 우리 삶 가운데서 모든 것이 변했으며 전혀 돌이킬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때이다"고 말한다.

설교자 F.B.마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 같은 상황에 처할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 무엇인가에 몰두하기에 감옥만 한 곳도 드물다. 번연히 탁월한 우화를 생각해 낸 것도, 바울이 주님을 만났던 것도, 요한이 열린 하늘 문을 통해 계시를 보았던 것도, 그리고 요셉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던 것도 이 감옥에서였다…(중략)…밤은 별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다(65쪽)"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어떤 사람은 실직하여 꿈을 잃고, 다른 사람은 취직이 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또 자녀를, 부모를 땅에 묻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고, 병으로 힘겨워하는 이도…. 혹자는 자신이 지나온 역경, 그 광야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다시 생각하며 감사하고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할 것이고 어떤 이는 블랙홀 한가운데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기억하자. 혹, 당신은 요셉 소명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광야에서 역경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고 빚어 가실지 기대하고 기다리고 인내하자.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블랙홀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자.

출처 : 네이버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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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
존 맥아더 저
황성철 역
생명의말씀사



오늘은 강해 및 말씀 본연의 해석으로 유명한 설교가인 캘리포니아 선밸리에 있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목사이신, 존 맥아더 목사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 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아주 오래전 존 맥아더 목사님의 [참된 예배]라는 책을 읽은 후 제가 가장 신뢰하는 작가 중 한 분이 되어 그 이후로 제게는 많은 영향을 주시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의 책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는 이미 오래전에 나왔던 책인데 작년 개정 증보판으로 새롭게 출판되었습니다.

존 맥아더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교리보다는 교회 성장에, 교인의 영적 양육보다는 교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진리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세지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고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곳에나 무관심이 팽배해 있다. 아무도 설교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떤 주제든지 설교면 그만이다. 단,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 찰스 스펄전

스펄전은 100여년전에 이 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20세기 말의 복음주의 상태를 묘사하는 듯하다. 당시 상당수의 목사들이 시험적으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시도하고 설교를 짧게 할때, 그는 설교에 대한 교회의 관용은 쇠락으로 접어드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이러한 흐름 속에  감춰 있는 큰 위험을 간파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 덕분에, 그는 결국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릇된 교리는 참을 수 있어도, 긴 설교는 결코 참을 수 없다. 일반 교인들은 설교의 내용보다 마지막 축도의 타이밍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주일 만찬과 배를 채우는 것이 주일 학교와 영혼을 살찌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장황한 설교가 이단보다 더 큰 죄악이 되었다. 교회는 그 동안 세속적인 실용주의 철학을 흡수해 왔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그 쓰디 쓴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시장 지향적 사역 철학은 우리 시대의 가장 나쁜 풍조에 호소력을 갖습니다. 이 사역 철학은, 자신을 우선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생활 양식이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으며,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영합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물질주의와 이기적인 사랑 가운데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하는 종교를 약속한다면, 그들은 떼지어 몰려들어 환영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시대를 내다 보았습니다. 그는 위에서 열거한 원리를 개괄한 후에 디모데후서를 마치려 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명한 구절로 자신의 충고를 간략하게 줄여서 디모데에게 전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디모데후서 4:2)
 그런 후에, 사도 바울은 이런 예언적인 경고를 덧붙였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쫒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쫒으리라." (디모데후서 4:3-4)
 분명히, 사도 바울의 사역에는 오늘날 아주 널리 퍼져 있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라" 는 이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구통계학 자료를 연구하거나, 교인들의 "느끼는 필요(felt needs)" 를 살피라고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충실하고 체계적으로 전하고, 또 경책을 담아 인내하면서 전하며, 당시의 세상 풍조와 가치인 시대정신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제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는지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교인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걷었는지, 혹은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디모데에게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이 디모데를 존경하거나, 존중하거나,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외적인 성공에 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헌신을 강조했지, 성공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대답을 분명하게 압니다. 풍요나, 사람 수나, 돈이나, 적극적 반응과 같은 외적인 기준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한 사역의 척도가 결코 아닙니다. 신실함과 경건과 영적 헌신이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시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질이 모든 사역 철학을 세우는 건축 돌이어야 합니다.  이는 큰 교회든지 작은 교회든지 상관없습니다. 크기가 하나님의 복을 표시하지는 않습니다. 인기가 성공의 지표가 아니라 오히려 사실상, 크기와 인기는 정죄받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예레미야 5:30-31)
다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을 사역을 고안해 내라고 권하지 아니하고, 고난과 곤경에 관하여 경고했습니다.  고난과 곤경은 현대 교회 성장 전문가들이 간절히 바라는 요소와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에서 외적 성공은 결코 타당한 목표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떻게 '성공' 할 것인지 말하지 않고 다만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표준을 쫒으라고 권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참된 성공의 정의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혹은 세상 사람들이 종종 쓰는 말로 표현하면, 우리에게 적합한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탁월함(excellence)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부르시고 은사를 주시사, 의도하신 그런 사람이 되라고 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공을 쫒으라고 충고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사도 바울은 탁월함을 쫒으라고 디모데에게 간절히 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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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크랩
두란노


“나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가 궁금하다. 어쩌면 그 이유들은 교회가 본래 되어야 하는 모습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 수 십 년간 교회에 충실하게 꾸준히 다닌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가는 데 흥미를 잃고 있는가? 그런가 하면 여전히 교회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가?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복음주의 대표 작가인 래리 크랩이 건강한 교회의 의미를 도발적으로 재정의했다.

“교회 홍수 시대에 예수님은 갈 곳이 없으시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100년을 넘어섰다. 이제 국내 어느 지역에 가든 붉은 십자가 간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렇듯 교회는 넘쳐나지만,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실망은 극에 달했으며, 교회를 둘러싼 듣기에도 민망한 사건사고들로 인해 교회 안팎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구세대의 유물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일주일의 하루를 지배하는 습관이다. 형식을 존중하는 교회이든 편안한 현대식 교회이든, 자유주의 교회이든 복음주의 교회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건물과 직원과 규정과 약속과 홍보 활동이 있는 하나의 기관이다. 하지만 교회는 그 이상이지 않는가?
교회란 무엇이며 본래 무엇이어야 하는가? 교회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 그런가 하면 왜 어떤 사람들은 교회생활에 흥미를 잃었는가? 내가 다니고 싶은 교회,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진정한 교회란 존재하는가? 힘을 보태 그런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 당신과 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이 시대는 ‘진정한 교회’에 목마르다!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복음주의 대표 작가이며, 전문 상담가로서 교회에서 수십 년을 지낸 래리 크랩은 이 문제를 점점 깊이 인식하면서 솔직하고 겸손하게 글로 풀어냈다. 이것은 곧 평생 교회를 다니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자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우리 하늘 아버지의 고민일 것이다. ‘넓은 길로 가는 우리 시대 교회들’에게 던지는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들! 이 시대 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래리 크랩은 이 책에서 현대 교회들에 올무가 되고 있는 약점을 파헤치는데, 그것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프로답게 일구어낸 특성이라고 칭송하는 것들이다. 그러고 나서 저자는 조심스럽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놓는다. 그것은 철학적이면서도 참신하고 실제적인 패러다임이다. 아울러 오늘날 교인들을 괴롭히는 의문들과 그가 탐색하면서 품게 된 새로운 교회상도 함께 제시한다.
이 책은 무난한 교회, 무난한 목회에 안주해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굳은 마음을 일깨워 다시금 주님이 맡기신 교회의 목적과 목표를 재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를 하고 싶은 목회자 및 예비 목회자들이 시대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바른 ‘교회’를 세워가도록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전환점이 되어줄 것이다. 교회 리더십은 물론이고 교회에 실망해서 신앙을 떠났거나, 교회생활에 회의가 드는 이들이 말씀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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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

1.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여호와
2.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제2부 순종함으로 자유하기

3. 기쁘게 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4. 미혹의 대가 사탄
5. 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6. 순도 백퍼센트 순종
7. 생명을 향해 열린 문, 순종

제3부 하나님의 질서에 뿌리내리기

8.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9. 하나님 나라의 법, 왕을 공격하라
10. 배나 존경할 자
11. 순종하는 마음, 복종하는 태도
12.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능력
13.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14.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

제4부 순종으로 깊어지는 믿음의 우물

15. 모든 영역에서 권위 인정하기
16. 순종으로 자라는 믿음
17. 그분의 보호 아래, 그 풍성하심 아래

 

존 비비어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2년 4월/303쪽/10,000원


제1부 그분의 날개 아래 거하기

1.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의뢰하는 여호와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 91:1-2).” 다윗의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보호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거하는 자는’이라고 제한하는 표현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 누가 그분의 보호 아래 있는가? 간단히 말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덮으심 아래 자유와 보호를 누렸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순간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여 벗어버린 바로 그것, 즉 “자신을 덮을”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함으로 인류는 한때 알던 귀한 자유와 보호를 잃어버렸다.


권위는 인기 있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권위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면 권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보호와 유익을 놓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권위를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권위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길은 완전하다. 당장은 쓰리고 아파 보이는 일도 실은 보호와 축복이나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2. 권위의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이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이 말씀에는 생각할 것이 많다. 첫째, 다스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 모르게 권위 있는 자리에 합법적으로 오를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우리는 이 개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둘째, 인간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곧 주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이며, 그것은 심판을 자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의 저자가 (권력에 굶주린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워치만 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복종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권위부터 만나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그 권위를 만났는지의 여부로 규정된다. 그런 권위를 만났다면 우리는 하나님한테 붙들려 있기에 앞으로 어디서든 다른 권위를 만나도 그분이 우리를 쓰실 수 있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성경적 기초부터 쌓아야 한다. 그 기초를 다지고 나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대한 복종의 중요성을 다룰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그 위에 쌓아올릴 모든 것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제2부 순종함으로 자유하기

3. 기쁘게 순종하는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고백할 뿐 아니라 행하는 이들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일반 개념과 정의는 이 말씀 앞에 무너진다. 우리는 ‘죄인의 기도’를 고백하기만 하면 천국이라는 안전지대가 보장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부분은 소홀히 하거나 전혀 강조하지 않았다. 이 사이비 은혜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곁길로 나가 순종을 경시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고백할 뿐 아니라 행하는, 즉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만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 12-13).”


말세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불법과 미혹이다. 불법이란 자기 일정과 즐거움과 계획을 주님 명령보다 더 앞세우는 습관에 젖어 그것을 정상적이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행동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복종하겠다던 고백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계획과 맞는 부분만 순종하면서도 자기들이 불법을 행한다는 걸 모른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것이 오늘날 믿는다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다. 성경은 불법을 ‘가장 큰 죄’라고 말한다. 죄의 핵심 정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미혹’이 팽배하다.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에는 미혹에 대한 경고가 거듭 나온다.


1980년대 말 나는 기도하는 중에 무서운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은 내 삶과 사역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나는 큰 무리를 보았다.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무리였다. 그들은 천국 문 앞에서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정작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넋이 나간 듯한 충격과 고통과 공포가 어렸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기독교를 믿었기에 당연히 천국에 갈 줄로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정 무엇이 죄인지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을 진정 열망하는 자녀들을 찾으신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기쁨으로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한다. 솔로몬은 순종에 따른 성공과 불순종에 따른 고생이 가득한 생을 마감하면서 모든 시대에 적용할 지혜의 말을 남겼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4. 미혹의 대가 사탄

미혹을 막는 가장 확실한 대비책은 전달받은 지식이 아니라 계시된 지식이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 3:1).”라고 밝히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고통하는 때’는 정부나 무신론자, 이교도들이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때가 아니라 교회 안에 미혹이 만연한 때다. 미혹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미혹된 사람은 사실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다고 굳게 믿는다. 예수님은 미혹에 대해 거듭 경고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그분의 경고에서 쉽게 긴박감을 느낄 수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어조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영혼에 새기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미혹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불순종(불법)이다.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미혹하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하나님의 말씀과 그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작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미혹의 문이 열린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하는 이유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했기(살후 2:10).” 때문이라고 했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안락이나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권리와 특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자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이 완전한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사실이 우리를 미혹에서 지켜 준다.


하와가 처음 한 번 불순종한 것이 불법이라는 은밀한 세력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서막이 되었다. 아담과는 달리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듣지 못하고 아담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이다. 하와에게 그것은 계시된 지식이 아니라 전달된 지식이었다. 그래서 뱀은 아담 대신 하와를 표적으로 삼았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계시해 주셔야 말씀이 우리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일종의 율법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겸손히 행할 때 계시를 받을 수 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하나님은 우리가 책을 읽을 때나, 타인의 말을 들을 때나, 혼자 성경을 읽을 때나 성령과 교제할 때 말씀을 계시해 주신다.


사탄은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을 무시한 채 조항만 끄집어내어 하나님을 불공평한 존재로 보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권을 공략한다. 사탄은 바보가 아니다. 주님 권위의 기초를 건드린 존재다.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하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보좌는 그분의 권위를 상징한다. 사탄이 미혹하고 곡해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왜곡한다면, 그때부터 그 권위의 기초는 그분의 피조물에게 의문의 대상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게 된다. 사탄은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처럼 되려 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노예 삼아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사 14:12-14).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탄을 물리치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7-8).”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경외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 누구보다 더 큰 유혹과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순종을 선택하셨다. 말씀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첫째 아담의 타락에서 배우라. 그리고 마지막 아담의 순종을 힘써 따르라.

5. 순종의 씨앗, 불순종의 씨앗

순종이란 참된 믿음의 증거인 까닭에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다.


불순종의 결과는 다양하다. 즉시 눈에 띄거나 분명하지는 않아도 씨를 뿌리면 거둘 게 있듯이 확실하게 여파가 있다. 영혼의 대적인 사탄은 이 지식을 우리가 모르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순종을 경시하고 미혹하는 전략에 쉽게 넘어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순종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즉시 생기는 이득에 비하면 불순종의 결과는 대단치 않다는 논리를 무의식중에 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미혹적이고 치명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것이 불법의 신비 내지 은밀한 세력이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 말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적용해 보라.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다가 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회개할 때 받아 주신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나아가 그분은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받아 주신다는 현대 신학은 틀렸다. 실제로 그런 주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위험한 주장이다. 우리를 지키고 죄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행 5:11).” 불순종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6. 순도 백퍼센트 순종

99.9% 순종이 사람에게는 순종으로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순종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삶은 한 인간이 불순종이라는 유희에 빠질 때 일어나는 일을 생생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사울에게 전한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모든 것을 멸절시키되 왕은 살려두었고 가장 좋은 소와 양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백성에게 주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했다. 아마도 당시 문화에 따르면 한 나라를 정복해 그 지도자를 생포하고 살아 있는 전리품을 왕궁으로 가져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탄식하셨다.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15:11).” 사울은 명령의 99.9%는 순종했으니 그것을 순종이라고 보겠지만 하나님은 불순종으로 보시며 그것을 ‘거역’이라고 표현하신다.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여 참된 회개에서 등을 돌릴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렇게 불순종하는 행동을 반복하기 쉬워진다. 둘째, 미혹의 휘장이 마음을 덮어 죄를 깨닫는 감각이 둔해지며 결국 그 감각 대신 논리적인 판단을 넣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죄를 지을 때는 비수가 이전만큼 예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에 휘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휘장이 두터울 대로 두터워져서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정당화만 있을 뿐이다. 미혹이 진리를 숨기며 양심이 마비된다.


이쯤 되면 경건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선악의 지식이라는 저주 아래 그냥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 이제는 성령께서 마음에 넣어 주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닌 곳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미혹된 자기 마음의 명령을 따라 살아간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의문(儀文)일 수도 있고(고후 3:6) 사회에서 통용되는 옳고 그름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다. 이제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그에게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내시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붙잡으신다. 언제나 우선 그분은 직접 죄를 자각하게 함으로 다가오려 하신다. 미혹의 휘장이 두터워져 하나님의 마음이나 말씀과 단절된 상태라면 그분은 선지자적 메신저를 보낸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보내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수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 5:19-20).” 여기서 ‘허다한 죄’란 반복하여 불순종한 결과 진리를 떠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지자적 경고까지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대개 하나님은 고생이나 질병이나 그밖에 고난으로 심판하신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67, 75).” 우리는 심판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순종이다.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과 욕심이 죽지 않는 한 결국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욕망은 대립하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선지자답게 단호히 선포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마법)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사술은 사람을 귀신의 세계에 활짝 열어 놓는다. 사술은 자기의 환경과 상황과 사람을 다스려보려는 것이 목표지만 귀신의 세계에 개입되다 보면 오히려 귀신에게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다.


고등부 목사를 하면서 비교(秘敎)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인근 고등학교들에는 장난삼아 강신술을 해 보는 고등학생들이 꽤 있었다. 마법이나 사탄교에 빠진 친구 얘기들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흥미로운 사탄교의 원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임에 사람을 새로 받아들일 때 그에게 마약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불법 성관계를 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는, 하나님의 법과 국가법을 어기는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역은 사술’이라는 진리를 배운 후에야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역이 클수록 더 많은 힘을 얻는다고 배운다. 사실이다. 거역은 사술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의 소위 사탄교 경전에도 그 개념이 있다. 몇 년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사탄교와 마법 전문 채널을 보았다. 사탄교 경전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기자는 제1계명을 이렇게 보도했다. “네 뜻대로 할지니라.” 그 말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 순간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1:7-8)”.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 한다(요 5:30).”


무지한 사람들은 불법을 자유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거역에는 자유가 없다. 거역하면 타락의 노예가 될 뿐이다.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예수님도 이 원리를 강조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7. 생명을 향해 열린 문, 순종

불순종이 하나님 앞에 심각한 문제라는 진리를 기억하고 삶의 정상 궤도로 돌아간다.


이스라엘을 보자. 광야를 지나는 동안 그들은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은 자기 땅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 바산 족속을 쳐서 함락시키고 아모리 족속을 멸한 상태였다. 발락과 그가 다스리던 모압 족속과 미디안 족속은 근심에 휩싸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겠다(출 23:27).”고 약속하셨다. 발락 왕은 사자를 보내 예언자 발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발람은 영적인 통찰력이 정확하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고, 그간 발람의 예언은 한 번도 성취되지 않은 적이 없던 터였다. 이튿날 그들은 바알의 산당에 올랐다. 그러나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자 엉뚱하게도 그의 입에서 축복의 말이 나왔다. 당연히 왕은 노했다. 그러자 발람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다시 저주를 되풀이했지만 그때마다 축복의 말만 나올 뿐이었다. 이때 발람에게서 의미심장한 표현이 나온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민 23:23).”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 수 있는 사술이나 복술이 없다고 선포했다.


중고등부 목사 시절, 마법사 역할을 하던 한 여학생이 예수님께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딸이 태어나기도 전에 딸을 사탄에게 바쳤다. 회심 후 그 여학생이 했던 말에 우리는 전율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저주를 할 수가 없어요.” 왜냐고 묻자 그 아이는 “저주를 하면 그 저주가 우리한테 돌아오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발람의 말과 일치한다. 설사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발했다 해도 그 저주는 발람의 머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거역과 사술의 영적 관계를 아는 발람은 왕에게 이스라엘 진 안에 모압 여자들을 몰래 들여보내라고 했다. 발람은 여자들에게 우상을 들고 들어가게 하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성적인 죄를 짓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했다. 거역이 이스라엘에 사술의 저주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 결과 불순종은 아무도 저주를 할 수 없던 이 민족을 염병이라는 저주 아래 몰아넣었다. 그들의 거역은 극악하여 모세와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 앞에 울며 회개하고 있는 앞에서도 뻔뻔하게 자랑삼아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온 파렴치한 이스라엘 남자도 있었다. 그러면 염병은 어떻게 그쳤는가?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자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였더니 염병이 그쳤다(민 25:7-8). 거역은 귀신이 다스릴 통로를 내주는 일이다. 하나님이 밝히 계시하신 내용에 불순종할 때마다 사술의 저주의 영향력 아래 제 발로 들어간다. 거역은 사술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즐거이 복종함으로 마귀를 대적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일단 불순종하여 고난을 겪기 시작하면 사람들 대부분이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한 실수에서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남을 비난하면서 불순종이라는 광야에서 계속 방황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미혹을 드러내고,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의도를 가려낸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울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승리도 없다.

제3부 하나님의 질서에 뿌리내리기

8.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권위를 존중하며,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남겨 놓는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여기서 ‘위에 있는 권세’란 누구일까? 위 구절에서 바울은 정부 당국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정부 지도자뿐 아니라 다른 영역들에 있는,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하신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하신 분야는 정부, 교회, 가정, 사회(고용주, 교사, 상사 등)다.


이 점에서 흔히 사람들은 마음에 담을 쌓는다. “인정사정 없고, 철두철미하게 악한 지도자들이 있다. 어떻게 감히 그 사람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라고 할 수 있는가?”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지도자는 20세기에서 가장 악한 지도자일 것이다. 애굽 왕 바로도 당연히 같은 범주에 드는 자다. 그 권위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 그 밑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우연이었는가?


그러나 바로를 그 권위에 앉힌 것은 하나님이지 마귀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무참히 학대하고 무수히 죽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우리의 편안함이나 세상의 안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큰 구원, 곧 구속이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들려주신 지혜로운 말씀을 들어 보라.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하나님은 바로의 학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심으로 온 천하가 여호와를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알리신 것은 당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구속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9:18, 11:33-34).” 그분은 우리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다. 아직 그 뜻을 밝히실 때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통찰과 이해는 물론이고, 말씀을 통해 일종의 패턴을 주신다. 그러나 어느 지도자를 왜 세우셨는지를 늘 보여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지혜와 선하심을 믿기를 바라신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절대 목적 없는 고난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고난을 바꾸어 당신의 구속을 이루는 데 쓰신다.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을 때도 그 뜻은 영원의 관점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를 판단하신다.


우리는 겸손과 순종과 기도로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다. 하나님 백성이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땅을 고쳐 주신다. 하나님이 친히 권위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심판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하시도록 남겨 놓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늘 마음을 열어 두자. 그분은 우리를 대적하는 분이 아니라 지지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9. 하나님 나라의 법, 왕을 공경하라

권위에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공손히 복종으로 대하며 의무를 다해야 한다.


“종들(직원들, 교인들, 시민들 등)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고용주, 교회 지도자, 정부 권위 등)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5-8).” 바울이 전한 말이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벧전 2:13-14).” 성령은 베드로를 통해서도 다스리는 모든 권위에 복종하라고 명하신다. 인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인간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인정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권위를 모른다면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복종하기 어렵다. 진정한 권위를 보지 못한다면 순종하려 애쓸수록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어느 대도시의 인기 있는 기독교 방송의 라디오 대담 프로에 나간 적이 있다. 10분쯤 진행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되어 작게 흘러나오는 광고를 듣고 있었다. 전국의 날씨를 전하는 대목이었다. 그는 날씨가 너무 추워져 주지사의 입술까지 얼어붙었다고 했다. 주지사의 이름까지 대면서 이제 그 입술이 얼어붙었으니 평소에 곧잘 내뱉던 실없는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물론 그 주지사가 늘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그는 주지사였다.


핍박받던 초대 교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위를 공경했다. 계속 지금처럼 행동하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불법의 세력에 힘을 더해 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살후 2:7).” 그런 행동은 성령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의 원리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라는 권위 인물의 행동을 지적했지만 사뭇 다르게 접근했다. 첫째, 요한은 헤롯에게 “당신이 그 여자(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마 14:4).“고 말했다. 그는 헤롯에게 경멸조로 말하지 않고 죄 자체를 지적했다. 둘째, 요한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자신의 권위로 헤롯을 대면했다. 셋째, 요한은 불손하게 왕을 비웃지 않았다.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행 23:5).”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 2:1-3).”


물론 이단을 이끄는 사람들은 복종이나 순종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유다서를 보면 이런 사람들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비방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유 1:9-10).” 어떤 지도자에 대해서든 경박하게 조롱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이 말씀은 다른 분야에 위임하신 권위에도 확대하여 적용해야 한다. 공경하라는 말씀이 나타난 구절들을 잘 보라. 가정과 관련해 하나님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하신다. 아울러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하신다. 사회의 지위와 관련하여 성경은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 6:1).”고 말한다. 교회의 권위에 관해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명한다.


10. 배나 존경할 자

사역으로 섬기는 사람들, 특히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을 더욱 존경해야 한다.


한나와 제사장 엘리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권위를 두신 영적 지도자라면 그 사람이 사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든 그 사람에게서도 받을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겉모습 너머에 있는 것을 보며,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공경한다면 말이다. 예수님은 한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사역자들에게서도 받을 것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한나는 엘리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경했다. 엘리는 한나를 판단하고 모욕했으나 한나는 엘리를 공경했다. 만일 한나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살았다면 엘리의 행동을 문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는 본능적인 논리로 살지 않고 여호와의 영적 권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을 믿었다.


성경은 타락한 권위와 경건한 권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위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을 높여 지도자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것은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이 자기 위에 두신 권위 위에 올라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보다 더 위에 있겠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제대로 심판을 안 하시니 제가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 13:20).” 절대 잊지 말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도 기적을 행하고 귀신 쫓는 권세를 주어 내보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결국 악한 자임이 드러나리라는 것도 아셨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매사를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의 과오를 드러내셔야 하거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사람도 분명 그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가 그에게서 떠날 때다. 교회에서 권위 있는 사람이 노골적인 타락이나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그 사람의 더러운 샘에서 더는 물을 길어 마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무척 단호하게 가르친다. 지도자가 간음이나 동성애나 착취나 절도나 이단이나 그 외 죄에 빠진 것을 당신이 알고 있는데도(혹은 사람들에게 폭로되었는데도) 그 지도자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다(고전 5:9-11).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그 다음은 선지자, 의인, 그리고 소자(어린아이)로 이어지는 모든 권위의 순서를 두시고 이를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궁극적으로 ‘보내신 이를 영접하면 그에 상응하는 상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겸손히 배우려는 마음,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좇는 이들만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으며, 그분을 통해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 꾸러미에 담아 보내실 때가 많다. 바로 그 방법을 통해 우리 마음의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11. 순종하는 마음, 복종하는 태도

순종이 권위에 대한 행동의 문제라면 복종은 권위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순종과 복종, 이 둘은 서로 다른 명령이지만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순종은 하면서도 복종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있고 복종은 하면서도 순종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있다. 순종(obey)이 권위에 반응하는 행동의 문제라면 복종(submit)은 권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점을 놓친다. 하나님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마음에 숨은 태도를 함께 보신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권좌를 물려줄 때 이렇게 당부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의중)을 아시나니(대상 28:9).”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바울의 말에도 순종과 기쁜 태도의 복종이 함께 들어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위의 영역이든 정부든,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하나님은 복종과 공경의 태도를 지니라고 명령하신다. 권위가 성경에서 ‘명백히’ 죄라고 하는 일을 시키지 않는 한, 행동으로 순종해야 한다. ‘명백히’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부인하라든지 사람을 죽이라든지 다른 신을 섬기라든지 하는, 예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라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다. 회색 지대나 판단의 재량 문제가 아니었다.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때만 권위에 불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12.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는 능력

지도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지도자에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 이들은 지도자의 비효율적 방법, 현명치 않은 결정, 지도자가 자기 삶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해 하소연한다. 지도자가 뭔가를 약속만 해놓고 감감 무소식이라고 불평한다. 사실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 목사가 뭔가를 못 보고 있다고 확신하며 이제 목사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는 불평을 불러들이며, 불평은 결국 불복종으로 이어진다. 이제 미혹에 맞장구치다 결국 속아넘어가 권위를 등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나님이 그들을 성장시키고 보호하시려고 그 권위를 그들 위에 두신 것인데도 말이다.


지도자인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갈라진 땅과 사막의 뱀과 전갈뿐이었다. 모세가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애굽에서 바로 아래서 살 때는 음식이라도 있었다. 모세는 괴로움과 굶주림만 주는 사람 같았다. 애굽에서 살 때가 더 좋았다!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오갈 정도로 불평이 심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무슨 말을 하는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 16:8).”


백성들은 자기들이 모세에게만 불복종하는 줄 알았지, 그 불복종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관계 있는 줄은 몰랐다. 순종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논리를 따라 살았다. 시각과 환경에서 나오는 제한적인 논리대로 사는 사람들은 이미 미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없다. 반면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여호수와와 갈렙처럼 결국 약속을 누리게 된다.


내가 8개월 간 애써 준비한 가정 셀 그룹 사역을 담임 목사가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나는 목사가 틀렸다고 믿었다. 나는 내 ‘분별’이 맞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기도 중에 그 프로그램을 밀고 나가라는 말씀을 들었었다. 나는 회의석상에서 20분 동안이나 가차없이 담임 목사에게 따졌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성령의 책망을 들어야 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대하고 있음을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후 주님은 내 마음에 성경 구절을 하나 새겨 주셨다.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내게 밝은 빛을 비추며 어려울 때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나는 그것이 시험인 줄 몰랐다. 하나님의 시험은 모든 상황이 끝날 때까지 모르기 마련이다. 시험은 언제나 우리의 숨은 심령을 드러낸다.


그 프로그램을 실행했다면 많은 영혼을 구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우리 심령에 새겨지는 데 더 관심이 많으시다. 그분은 하나님이다. 길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길이라면 그분한테는 다른 참신한 구상이 많다. 그러나 한 인간의 심령에 필요한 복종의 원리만은 절대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다. 복종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복종하지 않는 마음에는 아무 대안이 없다. 나는 담임 목사에게 순복하고서야 비로소 그 프로그램을 밀고 나가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권위 있는 사람이 내린 결정을 불평하며 끼리끼리 쑥덕인다면 불화와 반역을 심는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심판이 임한다. 나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합의한 것이 하나 있다. 혹 결정에 도움이 될 사실이 있으면 내게 일차로 재고를 건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의할 때 중요한 것은, 사안을 신중히 검토한 후에 자신이 전달하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도록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정보를 접한 뒤 결정을 바꾼 일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건의했는데도 내가 본래 내린 결정을 고수하면 우리는 힘을 합쳐 일을 진행한다. 연합하여 일을 진행했는데 내 결정이 틀린 경우에도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은 내 밑에 있는 사람들과 나를 모두 지키신다.


13.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 아래 그분의 보호 아래 남기 위해 예수님은 자기변호를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삶에서 이루시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즐겁고 누구나 좋아하며 아픔이 없는 그런 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주님과 친해지려면 우선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이 즐겁지 않더라도 그분의 친밀한 임재하심은 그 고생에 비할 수 없다. 다윗은 이것을 어려서부터 배웠다. 상한 심령은 희생적 삶이나 제사가 아니라 순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벧전 2:19).”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친히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심판하실 분을 한번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가 있는 사람 앞에 서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자기 변호를 거두심으로 예수님은 전 과정에서 하나님의 변호 아래 남으셨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변호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을 고소하는 사람을 심판자라고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를 잃고 만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처럼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권위를 약속하신다. 고난이 클수록 큰 권위를 맡기신다. 부당한 권위를 만나면 하나님이 당신을 복 받을 자리에 두셨음을 알라. 바르게 반응해 복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분노와 원한을 품을 것인지 선택은 당신 몫이다. 승자의 길을 택하라. 그것이 생명이다!


14.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

권위를 공경하는 자들은 큰 권위를 얻게 되며 존경을 받고, 하나님의 복이 뒤따른다.


우리는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의 결점을 보면서 기뻐하고, 그런 결점이 있으니 그 권위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낄 때가 정말 많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영적 성숙도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지표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는 권위의 잘못과 실수를 사용하셔서 우리 심령의 참 모습을 드러내실 때가 많다.


다윗은 철저히 권위에 순종했다. 그리고 그 모본은 그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 결과 다윗은 그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권위를 공경하는 사람은 큰 권위를 얻으며 존경을 받는다. 늘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그러나 권위를 욕하거나 경시하는 이들은 결국 자신도 멸시를 받으며 그 결과 심판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다. 거역은 전염되며 죽음을 몰고 오기 때문에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제4부 순종으로 깊어지는 믿음의 우물

15. 모든 영역에서 권위 인정하기

진정 구원받은 자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은 바른 권위를 식별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이라는 말에 열쇠가 들어 있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그분은 성령으로 분별력을 주신다. 요한도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고 이 사실을 확증한다. 워치만 니는 말했다. “진정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면 하나님의 권위가 머무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다(Spiritual Authority).”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권위를 아는 것이다. 그분과 그분의 권위는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를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한테는 얼마나 큰 모험인가! 하나님이 제정하고 위임하신 권위가 하나님을 잘못 대변한다면 하나님한테는 얼마나 큰 손해인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그런 권위를 정하셨다. 하나님이 권위를 제정하시는 것보다는, 인간이 그 권위에 두려움 없이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권위를 맡기는 것을 겁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도 두려움 없이 권위에 순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담대히 권위를 제정하셨으니 우리도 용감히 권위에 순종하자. 잘못된 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라 권위에 있는 이들의 잘못이다. 주님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고 명하시기 때문이다.


순종하는 자들은 순종만 하면 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잘못된 순종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반대로 그분은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위임된 권위에게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은 반역이다.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은 그 점에서 하나님에게 책임져야 한다.

- 워치만 니의 『Spiritual Authority』 중에서


이 글은 권위에게 부당하게 대우받은 사람이 쓴 글이다. 워치만 니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에서 외국 선교 단체의 도움 없이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돕다가 당국의 분노를 사 1952년에 체포되어 수많은 거짓 고소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감옥에서 지냈다. 그러나 주를 경외하는 삶이 그대로 많은 죄수들에게 복음의 증거가 되어 그의 간증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많았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을 읽는다.


16. 순종으로 자라는 믿음

복종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믿음도 커진다.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고 승자가 되는 것이 우리 소명이다. 그분 길로 행해야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으며 우리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지 않으셨는가.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고전 1:25).” 우리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고후 10:5”) 사람이다.


시간은 짧다. 따라서 우리는 효율적이어야 한다. 순종은 효율을 가져다 준다. 처음 거듭났을 때 나는 열심히 일했으나 순종은 부족했다. 내 일에는 효율이 없었고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었다. 믿음이 자랄수록 나는 부지런한 순종이 당장은 효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효율이 높다는 것을 깨닫는다.


17. 그분의 보호 아래, 그 풍성하심 아래

그분의 보호 아래 거하면 우리는 그분의 풍성함에 참예하게 된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이들에게 약속된 보상을 언급함으로 결론을 내리자.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아 2:3-4).” 그분의 아래 생명 나무가 있다. 이 실과는 언제나 달다.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는 이성의 눈에는 좋아 보였지만 결국 죽음을 불러왔다. 이성의 나무에서 따먹은 실과는 모두 마찬가지다. 그분의 보호 아래 거하며 먹는 실과는 우리를 그분의 잔치로 초청한다. 거기서 그분의 풍성함에 참여하게 한다.


기도와 묵상으로 마음을 열고 지금껏 삶에서 불순종한 영역들을 지적해 달라고 성령께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살피게 하라. 하나님 말씀의 빛은 불순종하는 영역들을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관련된 영역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와 관련 있는 영역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보여 주시는 영역들을 직접 적어 보고, 용서와 회복을 받기 위해 기도한다. 권위에게 직접 찾아가거나 편지로 용서를 구하라. 힘들겠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순종에는 큰 보상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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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2011 bcjc Reading & Sharing 5번째 책 [오두막]입니다.
지금까지의 책과는 다르게 이 책은 소설입니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기 때문에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는 600만권이상, 한국에서는 2009년 베스트 판매량에 오를 정도로 알려진 책이지만,
이 책이 상당히 신학적이고 깊은 성경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학적 내용으로 인해 이 소설을 신학적 아티클로 풀어 쓴 책들이 다양하게 있을 정도입니다.

오두막은 깊은 상처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상처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꼭 먼저 들러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다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가기 싫고 건드리기 조차 싫어합니다.
그곳이 오두막입니다.

오두막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오두막을 두시는 이유와 우리가 오두막에 가야 하는 이유를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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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11 bcjc Reading & Sharing 세번째 책이었던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소개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미 잘 알려진 저자로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책으로는 [상처 입은 치유자] [영적 발돋움] 등 주옥같은 글들이 있지만
나우웬의 모든 글을 함축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든다면 바로 오늘 소개한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사단의 3가지 시험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극복하고 이겨 나가야 하는 시험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세 가지 시험은 바로 상황부합의 시험, 이목집중의 시험, 권력확보의 시험입니다.
이것을 뛰어 넘어 하향성의 삶을 걸어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 우리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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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민정 2011/04/08 18:22

    내가 말하는 생각이나 말을 통해서 나를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의 이상이 나를 가장 잘 드러내 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온갖 말과 생각을 갔다 붙여도 나는 나를 증언할 수 없었다. 내가 하나님보다도 나의 이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동안 하나님보다도 내가 원하는 바가 더 커져버렸다.
    그리고 헨리 나우웬의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읽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셨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하여 증언한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못하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 주시는 분은 따로 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나는 안다."(요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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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헨리 나우웬 지음/피현희 옮김

두란노/1999년 9월/102쪽/4,500원


▣ 저자 헨리 나우웬

예수회의 사제이며 심리학자이다. 간결한 문장과 적절한 묘사로 영혼을 맑게 울리는 그의 저서들은 세계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의 큰 호응을 받아왔다. 그의 글은 세속 명예를 멀리한 채 기독교적 사명감에 충실했던 삶의 과정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현대 교회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는 예일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 박약 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 디이브레이크에서 사역하다가 1996년 9월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20여 권의 저서가 있는데 그 중 잘 알려진 책으로는 『제네시 일기』 『마음의 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영적 발돋움』 『영혼의 양식』 『거울 너머의 세계』 『예수님의 이름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모든 것을 새롭게』 등이 있다.


▣ 옮긴이 피현희

두란노 편집장이며 온누리 교회 문화 사역자로 일하고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섬김은 기도이며 기도는 섬김이다.” 이 책은 사역과 영성은 절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며, 사역자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심오한 진리를 담았으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언어로 표현하는 헨리 나우웬은 가슴 깊은 곳에서 또한 자신의 경험에서 건져 올린 말로 사역자의 삶의 기쁨과 그 도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 책에서 사역은 영성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음을,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처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예수님의 치유하심과 붙드심과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행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사역자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논의하면서 나는 다음의 세 가지를 강조하려고 했다. 첫째,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기억 위에 세워져 있다. 둘째, 현재의 안락함이라는 거짓된 망상을 벗겨 내고 사람들에게 본래의 비전을 기억나게 할 때 진정한 안내자가 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일을 통해 이런 비전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된다."


▣ 차 례

프롤로그

1.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서론/ 상처/ 치유/ 치유자/ 결론

2. 예수님의 붙드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서론/ 지탱해 주는 것/ 지탱해 주기/ 지탱해 주는 사람/ 결론

3.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서론/ 인도/ 인도하심/ 안내자/ 결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헨리 나우웬 지음/피현희 옮김

두란노/1999년 9월/102쪽/4,500원


프롤로그

사역자들의 영적인 자원은 무엇입니까? 많은 과업과 계획과 약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 속에서 실상 자신의 가슴을 어딘가에 잃어버리고 만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역이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섬김입니다.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고 억압된 자를 풀어 주며 주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영성이란 우리 안에 있는 영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영성은 광야로 나가든지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성은 주님 앞에 열린 가슴과 생각으로 서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역과 영성을, 섬김과 기도를 분리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위험합니다.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롭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사역과 영성의 관계를 찾아서 어떻게 섬김이 기도이며 기도가 섬김인지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이런 탐구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사역을 ‘기억’으로, 사역자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공동체를 세우는 일 외에 공동체에 대한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그들이 받은 그래서 이미 알고 있거나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들을 신실하게 ‘기억나게 해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1944년 헝가리의 시게라는 도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현재 유명한 소설가이자 보스턴 대학교 교수인 엘리 비젤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살에서 살아남았으며 이십 년이 지난 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시게 주민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 유대인들을 지워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시게 주민들이 어제의 자신들의 이웃을 쫓아낸 데 대해서 아니면 그들을 부인한 데 대해서 내가 화가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가 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웃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빨리, 그렇게도 완벽하게 유대인들은 그 도시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도 쫓겨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죄악을 망각하는 것이 우리가 죄를 짓는 것 자체보다 더 큰 죄임을 암시합니다. 잊혀진 것은 치유 받을 수도 없고 쉽게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은 더 큰 악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잘라 버림으로써 우리의 미래도 함께 마비됩니다. 즉 우리 뒤에 있는 악을 잊어버리면서 우리 앞에 있는 악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먼저 예수님의 치유를 생각나게 하는 사역자가 우리의 상처 입은 과거를 치유함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가장 빈번히 부딪히는 고통은 바로 기억에 의한 고통이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 고통들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상처 입은 고통들입니다. 소외감, 외로움, 분리감, 불안과 두려움, 불신감, 신경 쇠약, 불면이나 손톱을 물어뜯는 것 같은 이 모든 증세들은 바로 어떤 기억들이 취하고 있는 양상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들입니다. 이런 기억들은 때로는 우리 존재의 핵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고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를 잊어버리는 일은 우리의 가장 친밀한 선생이 우리의 적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들과 직면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는 가운데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상처를 직면하는 자만이 치유가 가능하며 새로운 방식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확증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 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막 2: 17)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상처 입은 기억들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사역자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임무는 과거의 상한 기억들에 접근하고 그런 기억들이 두려움 없이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비가 내릴 때 땅을 갈지 않으면 씨앗에 닿을 수가 없습니다. 잎들을 다 긁어 내지 않으면 나무의 가려진 부분들에는 태양이 자양분을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기억들도 두려움과 불안과 의혹으로 덮인 채 남아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치유 과정의 한 측면일 뿐이며, 사역자의 위대한 사명은 인간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는 상처가 하나님이 직접 겪는 고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치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작은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겪으시는 엄청난 고통에 대한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아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아주 은밀한 영역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운 잊혀진 기억들을 끄집어내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들을 모든 인류의 고통, 자신이 짊어지셔서 새롭게 바꾸신 고통과 연결하십니다. 그러므로 치유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이 더 큰 고통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슬픔이 더 큰 슬픔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경험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 26)고 하신 그리스도의 더 큰 경험의 한 부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은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양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자신의 이야기의 일부를 숨기면서 스스로 경건한 체 하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과거의 심판관이 되어서 자비를 제한하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고통에서부터 자신들을 단절시킵니다.


도전적인 사역은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즉 병든 사람들이나 슬퍼하는 사람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억압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세상이나 종교 기관의 복잡한 망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업의 한 부분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통찰과 경험을 통한 치유는 아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여 전에는 단지 파괴적으로 보이던 기억들이 지금은 구원의 한 부분으로 되찾아지는 ‘새로운 연합’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치유자로서 주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런 것처럼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욕구와 생각과 행동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방식으로, 기도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갈 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님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정사와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서 단절시킵니다. 얼마나 바쁜 활동들과 쉼 없는 염려들이 우리를 단절시키면서 자신의 무질서한 방향과 헌신밖에는 기억시켜 주지 않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잊어버린 낯선 땅에서 곧 이방인이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 방해가 되며,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악순환 가운데로 끌어당깁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과의 친밀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일단 듣고, 보았고, 상고했고, 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기억 장치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의무가 아니라 자유롭고 자율적인 반응으로 그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반응들을 지속적으로 하고 또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필요에 맞추기 위해서 훈련과 체계화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2. 예수님의 붙드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벽 너머의 도시』와 『예루살렘의 걸인』에서 엘리 비젤은 한 인간을 지탱해 주는 우정의 힘에 대해 아주 탁월한 방법으로 이야기합니다. 두 책 모두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흘러나는 것은 단순히 친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친구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입니다. 『벽 너머의 도시』에서 마이클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곁에 없는 친구 페드로에 대한 기억이 슬픔 가운데서도 그를 지탱해 주었기 때문에 미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걸인』에서 데이빗은 이스라엘의 6일 전쟁에서 죽은 친구 캐트리엘에 대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비젤은 자신의 소설에서 ‘기억’이 우리를 과거와 연결해 줄뿐만 아니라 현재를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심오한 진리를 표출합니다.


그는 여기서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한 신비를 만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의 역사를 기억할 때 이스라엘은 그들 스스로 이런 역사 속에 들어갑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들을 현재로 이끌어 오며 현재 이곳에서 그 사건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은 참여를 의미합니다.


인생의 신비 중 하나는 가끔 우리는 마주 대할 때보다 서로를 기억할 때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서로 보지 않고 있을 때 기억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불러내 영적인 연합이라는 새로운 친밀감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창조적인 기억과 연결된 만남과 헤어짐의 계속적인 상호 관계성은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순화하고 깊게 하며 지속하는 한 통로입니다.


이런 지탱해 주는 힘에 대한 기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서 가장 신비롭게 보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기억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돌보시고 지탱해 주시는 그런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 7, 13)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변화산에서 그분을 뵈었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의 귀와 눈은 닫혀 있었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분이 떠나간 후에야 그분의 진리의 영이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드러냈고 더욱 더 새롭고 친밀한 만남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한 임재가 고난 가운데서 제자들을 돌보고 지탱해 주었으며, 그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소망을 일으켰고, 또한 그분을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의 구원 사건들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기억, 즉 현재 여기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고 세워 주면서 일상의 많은 위기 가운데서 우리의 참 존재의식을 뿌리내리게 해주는 기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붙드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사역자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현존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재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주님을 기억하게 하는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떠나는 것이 성령님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며, 우리의 부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새로운 방법으로 임재하실 수 있음을 깊이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 현존이 없는 부재는 단지 공허함이며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탱해 주는 사역을 할 때 사역자는 창조적으로 물러날 줄 아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제네시 수도원에 계시던 나의 영적인 스승은 일주일에 하루를 수도원에 딸린 한 조그마한 암자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이런 부재가 내게 아주 위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그가 곁에 있는 것을 그리워했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온종일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한 관심이 바로 하나님이며, 그가 사람들의 모든 염려들을 가져가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의논하며, 그가 떠나 있지만 실제로는 어느 때보다도 더 나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기운이 나고 힘을 얻고 강건하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떠난다는 것이 하나님과 특별한 만남을 의미할 때 그 부재는 또한 우리 자신을 붙들어 주는 부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 하나님과의 기도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자신의 사역의 중심으로, 시작과 끝으로 간주하십니다. 기도나 하나님과 홀로 하는 날들이나 침묵하는 시간들을 가지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있을 때 사람들과도 친밀해질 수 있으며, 우리의 사역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심장부에 닿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철저히 무력함을 기도로 표현하고 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미소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며, 우리가 염려하는 일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기도를 생각해 보면, 어떨 때는 마치 하나님과 작은 세미나를 하는 것처럼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기도문을 읽고, 심오한 생각들을 하고, 인상에 남을 말들을 하면서 아주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점수를 받을지 아주 고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용한 사람이 되어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해드리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훈련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좀더 무용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 자신의 유용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새로운 삶으로 부르고 계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역이란 무엇보다도 이런 ‘무용의’ 기도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뻗어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인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침묵의 기도에서 비롯됩니다. 참으로 그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3.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엘리 비젤은 자신의 소설 『숲으로 난 문들』에서 그레골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레골은 과거의 끔찍한 시련들을 겪은 후에 새로운 미래를 찾아 파리로 옵니다. 그곳에서 그는 친구의 충고에 따라 주저하지 않고 랍비를 찾아갑니다. 랍비가 그레골에게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고 묻자, “저를 울게 해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랍비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걸로는 충분치가 않아요. 노래할 수 있도록 가르쳐 드릴게요. 다 큰 사람은 울지 않습니다. 거지도 울지 않습니다... 우는 것은 아이들이 하는 짓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아이입니까? 당신의 삶이 아이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니 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랍비 선생님은 저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모든 것을요.” 그러자 그레골이 저항하기 시작했고, 랍비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했고 그를 이겼습니다. 천사는 새벽이 가까웠으니 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야곱이 그를 가게 해주었고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천사는 그에게 사닥다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저에게 이 사닥다리를 가져다주세요.” “우리 중에 누가 야곱이죠? 그리고 누가 천사죠?”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아나요?” 랍비는 다정하게 윙크를 했습니다. 그레골이 일어나고 랍비가 문으로 그를 배웅했습니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 줘요.” 랍비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우리 축제에도 오실래요?” “그러겠습니다.”


그레골에게 자전적인 특성들을 많이 부여한 엘리 비젤은 이 대화에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표현합니다. 눈물 뒤에 노래가 있고, 슬픔 뒤에 축제가 있습니다. 투쟁 뒤에는 감사함으로 천사에게 내려오는 사닥다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랍비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대화에게 그레골은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랍비는 대답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와 투쟁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로 향한 사닥다리를 역시 보내 주십니다. 비젤은 우리가 과거를 잊지 않기를 원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 또한 잃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인 사역자들은 치유자와 붙들어 주는 자일 뿐만 아니라 안내자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우리를 지탱시키는 기억은 또한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고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줍니다. 살아 있는 기억 장치가 된다는 것은 기억하는 일을 통해 자신들이 맡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는 선지자가 됨을 의미합니다.


좋은 기억은 좋은 인도함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 가운데 친절한 말, 사랑의 표식들, 염려해 주는 몸짓들, 평화로운 침묵, 즐거운 축제 등의 좋은 기억들은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 당연하고 단순하고 어떤 많은 결실들도 없었지만 그런 것들이 기억이 되었을 때는 혼란과 두려움과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를 구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기억들은 의식적인 기억이나 성찰 이전 단계에서 우리를 인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서 피와 살이 되어 우리 존재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존재 자체가 우리의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문화와 비틀거리는 사회와 어두운 세상 한 가운데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그 기억들은 우리 미래의 청사진으로서, 우리를 도와 믿음으로 이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노예 되었던 땅을 떠나게 합니다. 또한 약속의 땅이 여전히 우리 앞에 있다고 말하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사역자들은 기억에 대해서 대항하거나 기억에 영감을 불어넣는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이상을 우리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자기 만족에 겨워 질식할 정도로 좁게 끌어내리는 것을 모든 개혁자들이 대항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이상들이 확신에 찬 호소력을 잃고 희미해져 버리는 그런 형태의 삶에 대항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는 이런 거짓된 벽들을 무너뜨리고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대항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도전합니다. 그러나 또한 인도는 대항하는 일 이상을 요구합니다. 위대한 영감이 시작되었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영감을 불어넣는 일을 통해 사역자는 다시금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위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랍비들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우리들은 이야기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엄청난 능력 가운데 하나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대항하지만 억압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영감을 불어넣지만 술수를 쓰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어떤 공간으로 우리를 초청하여 만나게 하고 대화를 함께 나누게 합니다. 비젤은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인간을 만드셨다.”고 씁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사람들의 생애를 상기시켜 줄 수 있는 한, 새로운 이야기가 숨겨진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상담자와 안내자가 나타나게 하는 그런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묵상과 기도에 있습니다.


... 묵상한다는 것은 본문을 읽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의 완전한 의미는 존재 전체로 깨닫는 것입니다. 즉, 입으로 그것을 낼 때 몸으로, 그것을 고정시키는 기억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는 지성으로, 또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의지로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또한 모든 것의 근원이 됩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추진하는 힘입니다. 기도는 또한 모든 것의 인도자입니다. 만일 기도가 옳다면 모든 것이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어떤 것도 잘못되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성숙을 이루도록 인도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며 많은 함정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영적인 요구를 부인하는 것은 이 지극히 민감한 현대 경험의 영역에서 아마추어리즘을 부추기는 형식으로 맞불을 지피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에게 성령의 삶이란 아직 낯선 분야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거룩하지 않은 영들이 장악하여 엄청난 파괴를 일삼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여 사람들의 영과 몸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인간 관계에도 활발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영 분별자들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분별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오직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 훈련을 통해 형성되고 다듬어진 사역자의 영적인 삶이야말로 영적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계속 교제하고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사로잡힌 데서 불러낼 수 있으며 희망을 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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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지음 IVP/2003년 2월/254쪽/8,000원


▣ 저 자 김영봉

충남대학교에서 경영학,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미국 SMU와 캐나다 McMaster 대학에서 신약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협성대학교에서 신약 신학을 가르쳐 왔으며, 2002년에는 미국 Drew 대학교의 방문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사귐의 기도』『마태복음주석』『신약성서 이해』『예수의 영성』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번영을 신실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왔다. 반면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재앙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하나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떼고 나면 그 나머지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깨끗하고, 수입에 대한 몫 가르기에서 깨끗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도 ‘깨끗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나는 이것이 진리로 통하는 우리 상황을 매우 염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신 소명에 대해 생각하면 ‘깨끗한 부자’되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다. 거룩한 삶이 언제나 부유한 삶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완성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독교 청부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제한적으로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라는 부르심과 자신의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떼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은 잘한 일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핵심에 속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르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남은 돈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부르심을 듣고 나면 ‘깨끗한 부자’가 목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차 례

제1부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제2부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삶

제3부 나눔으로 풍성한 행복

제4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섬김

제5부 세상을 바꾸는 참된 힘

 


제1부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짐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멀리 있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아 주셨다. 이발을 마치면 아버지는 이발사에게 ‘적어 둬!’라고 말씀하시고 그냥 나오셨다. 아버지와 우리 네 형제가 1년 동안 부지런히 드나들며 이발을 했어도 돈을 낸 기억은 없다. 그 대신 보리타작을 마치면 보리 한 자루를, 가을 추수를 마치면 쌀 한 자루를 실어다 주시고는 그 모든 값을 치르셨다. 또 장날이면 어머니는 흰 쌀을 잔뜩 담아서는 장으로 가셨다. 돌아오실 때면 언제나 손에 생선이며 신발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쌀을 주고 물건으로 바꿔 오신 것이다.


불과 40여 년 전 우리의 농촌 상황이다. 당시에도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에 비해 돈의 중요성이 훨씬 덜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웬만한 문제는 돈 없이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라졌다. 도시에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모든 거래가 돈으로 이루어진다. 시골의 작은 가게에서도 돈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벌고 불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모두들 재테크에 관심이 많다. 재테크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항상 한두 권씩 올라 있고,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스팸 메일 중에서도 반 정도가 ‘많은 돈을 쉽게 버는 방법’에 대한 선전이다. 돈을 벌고 불리는 일에 그토록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점이 있다. 돈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기 이전에 먼저 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물에 관한 기술’을 배우기에 앞서 ‘재물에 대한 철학 혹은 신학’을 배워야 한다. 그것 없이 재물을 키워 가기만 하면 결국 재물 때문에 낭패를 당하게 된다. 금을 캐 가지고 귀국하던 사람이 배가 침몰하자 금 상자에 자신의 몸을 묶고 익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듯, 돈은 우리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돈이 현대인의 삶에서 중요해진 만큼 그것 때문에 당하는 피해도 적지 않다.


돈이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점은 옳다. 하지만 돈이 본질상 위험한 것임을 망각하거나 돈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재물과 하나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지 둘 다 가지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돈이 끌어들일 수 있는 악한 영적 능력 때문이다. 이 말은 돈 자체에 귀신이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돈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 그 힘에 예속될 때, 그것은 단순한 구매력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리처드 포스터는 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돈은 단순한 중립적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것도 매우 악마적인 성격의 힘인 것이다.”


둘째,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돈의 유혹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하는 본능을 주셔서 다른 존재와 함께 나누며 살아가도록 만드셨다. 이 본성대로라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같이 넉넉하게 살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타락하면서 사랑의 본능이 비뚤어진 데 있다. 타락으로 인해 남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타락한 본성 때문에 돈은 위험하다. 인간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 수렁과 같다. 그리고 돈 때문에 더 많은 욕구가 생기고 그 때문에 인간은 더욱 타락한다.


그러므로 돈의 위험성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칼은 잘 사용하면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살상 무기가 된다. 마약은 잘 사용하면 치료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인간을 파멸시킨다. 담뱃갑에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라고 적어 넣은 것처럼, 돈에도 “지나치게 많은 돈은 당신의 삶에 해롭습니다”라고 새겨 넣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 위험성을 너무도 쉽게 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요청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뜻을 오해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방법으로 번 돈’이 바로 하늘에 쌓는 보물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를 선용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헌금하는 것이 돈을 ‘하늘에 쌓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신 것이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 이끌리게 되어 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지상의 물질을 보물로 여김으로써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김으로 우리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바라도록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더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재물이 가진 위험과 한계를 알기 때문에 하늘의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마음을 견고하게 하나님 나라에 묶어 둘 때 비로소 돈이 제대로 보인다. 그 때에야 돈을 섬기지 않고 도구로써 사용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이 생긴다. 이것이 돈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제2부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삶

많은 사람들이 금욕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고행을 통해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모든 욕망을 철저히 억압하는 태도를 금욕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동남아를 여행하면 금욕주의적 수도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2001년 『기네스북』에는, 한 팔을 들고 있는 것이 신을 영화롭게 한다고 믿고 십여 년 동안 팔을 들고 수행하는 어느 수도사의 사진이 나온다. 그의 종교적 열성은 정말 놀랍지만, 그것이 올바른 수행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행동만을 보고 금욕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의 금욕주의는 ‘인생의 일반적 쾌락을 절제하고 물질적인 만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금욕적이다. 극단적 금욕주의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지만, ‘금욕적 경향을 제거한 기독교’ 역시 상상할 수 없다.


경제 문제를 다룰 때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인간의 욕망이다. 돈이 위험한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돈 문제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욕망의 문제를 제대로 보고 해결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정신의 주도적 원리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신은 ‘배’다. 배를 채우는 것, 즉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은 하나님이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욕망을 그대로 둔 채 욕망의 대상만 바꾸자는 것은 속임수다. 그것을 ‘거룩한 욕망’이라고 부른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 대해 우리는 자주 그것을 ‘본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틀린 말이다. 더 가지려는 이기적 욕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심, 더 편하게 살기 원하는 욕심, 혹은 오감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이 인간의 본성인가? ‘본성’이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바탕을 뜻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런 이기적 본성을 우리에게 심어 주셨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는가?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이기적 욕망이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다른 피조물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는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겨났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새로운 삶의 중심이 필요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자아’였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기적 욕망과 물질적인 것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경향이 본성이 아니라 타락함으로 생겨난 제2의 본성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욕망은 인간성의 자연스러운 요소가 아니다. 이기심과 물질적 욕망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다면 그 욕망을 위해 사는 삶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본성이 아니라 치료해야 할 질병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만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데서 행복을 찾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그분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삶의 중심에 그분을 모셔 들임으로 그 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이기심과 욕망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신다.


모든 욕망을 근원적으로 뿌리 뽑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인간성을 타락시키는 욕망을 경계하고 제어하며 하나님과 하나됨을 전심으로 추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 인간이 되기를 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은 외형적으로는 얼마간 금욕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식욕은 하나님이 우리 몸에 입력해 주신 좋은 프로그램이다. 그것을 잘 사용하면 건강을 도모하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지만, 그것이 식탐(食貪)이 되면 필경 건강을 망친다. 음식 먹을 때는 식욕에 압도되지 말고 몸을 위해, 즉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한다. 그것이 노자(老子)가 전해 준 지혜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번다면 반드시 그릇된 길로 가게 된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을 따라 돈을 추구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건강과 가정을 희생시킨다. 하지만 살기 위해 돈을 구하는 사람은 무한정으로 구하지 않는다. 그는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많은 돈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필요한 만큼’이라는 말이 우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새로 지어지고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착각한다.


우리의 살림살이를 정직하게 살펴보면 꼭 필요한 물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가 원해서 소유하게 된 것들이 더 많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주변을 보면 딱한 일이 많다. 학생들은 책값이 없어 복사해 사용하면서도 최신형 핸드폰에 여러 가지 부속품들을 붙이고 최첨단의 전자 기기를 가지고 다닌다. 가계에 짐이 되더라도 남들이 가진 것이면 모두 가지려는 사람들도 있고, 체면과 품위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져 욕망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비로소 눈이 열려 ‘필요’와 ‘욕망’을 구분할 수 있다. 욕망의 요청을 절제하며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돈만 있으면 충분하며 따라서 그 이상의 나머지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진정한 만족도 불가능하며,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도 없다.

 

제3부 나눔으로 풍성한 행복

내 소비를 줄여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나눔은 내 행복을 감소시켜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눔이란 어느 한 편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다른 한 편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부를 쌓는 것이 결국 나와 이웃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처럼, 나눔은 나와 이웃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 이 진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진정한 나눔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단지 누구를 도왔다는 공로감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나눔이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분의 감화력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 내 손에 들어온 넘치는 재물이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영성적 나눔은 구제나 자선이 아니다. 그들의 몫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것을 깨닫고 제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다른 사람이 눈물짓고 있는 이상 나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웃을 때 나도 진정으로 웃을 수 있다. 나눔은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깊이 인식하고 행할 때 참된 의미를 가진다. 내 것으로 남을 돕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고통 받고 눈물짓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 한 나 혼자 행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얼마 전 어느 방송사에서 <할머니들의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할머니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분들은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삯바느질 혹은 폐지를 주워 번 돈을 모아 대학교에 기증했다. 그분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만큼의 물질로 만족하면서 돈을 모았다. 이 저축은 큰 나눔을 위한 저축이었다.


기업가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는 유한양행의 창설자인 유일한 선생을 존경한다. 그가 기업을 일구어 많은 돈을 모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으로 번 돈을 저축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 돈을 재투자하여 사업을 더 일구고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한다면 그것은 좋은 나눔의 방법이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는 통장에 쌓인 돈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는다. 좋은 제품과 그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안정된 삶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들 중에도 기업의 공개념(公槪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신의 돈과 희생으로 일군 기업이니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내 것’이라는 애착심 없이는 큰 기업을 일구기 어렵다. 그러나 그 기업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기업의 수입을 모두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인의식과 소유욕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마치 자기 개인 돈을 주는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일꾼들을 위해 포도원을 경영하는 선한 주인처럼 혹은 양들을 위해 목장을 경영하는 선한 목자처럼, 기업가들도 기업을 직원들의 것으로 그리고 모든 시민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기업가들도 다른 직원들처럼 자기 몫의 월급에 만족할 정도로 성숙해져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기업가들이 무슨 재미로 고생하며 사업을 하겠는가?”라고 질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얼른 보면 정당한 반론인 것 같지만, 이 질문을 뒤집으면 “나는 내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인 사업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하는 데서 보람과 기쁨을 얻어야 한다.

 

제4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섬김

나는 제자들에게 “목회자는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어떤 학생들은 이것을 잘못 알아듣는다. 아무런 영적 능력도 없이 교인들을 따라다니며 허드렛일이나 도와주는 것을 ‘섬김’으로 착각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 전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작업복을 입고 교인들의 이삿짐을 따라다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가 ‘섬기는 자’라는 말은 목회자로서의 능력과 권세를 교인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잘 섬기기 위해서는 영적 능력과 권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직장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직장에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맡은 자리에서 잘 봉사하기 위해 그 자리가 요구하는 전문적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한 회사의 사장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는 그 회사를 잘 키워 좋은 제품을 사회에 공급하고 사원들이 안정되게 살도록 돕는 것이다.


최선의 봉사를 위해 훌륭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는 봉사만을 강조해 왔다. 열심히 노력하여 전문적 자질을 키우는 것을 ‘세상 일’로 규정하고 부정적으로 가르친 교회들도 많다. 그 결과 오늘날 직업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문가적 탁월성을 발휘하는 예가 많지 않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갈수록 전문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교회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로만 모이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서 매우 조심할 것이 있다. 그렇게 키운 실력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섬김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고 입신양명의 도구로 오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처럼 속기 쉽다. 선한 일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돈을 추구하다 보면 그 돈의 마력 때문에 어느새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마음을 쓰게 된다. 실력도 그와 같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깊이 뿌리박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실력을 배양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구를 채우는 데 사용된다면, 그 실력은 돈과 같이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숨은 곳에서 헌신적 봉사를 하다가 매스컴에 노출되어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로 ‘뜨는’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유명해지기 위해 일하지 않았지만, ‘뜨고’나면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가 권력 혹은 유명세에 얼마나 취약한 지를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잘 섬기기 위해 전문가적 실력을 쌓는 일은 찬성하시지만 더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지기 위해 실력을 쌓는 일은 찬성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축구하는 일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준비된 실력을 사용하여 봉사할 때 하나님은 그에 맞는 자리에 우리를 알아서 세워 주실 것이다.


한편, 경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사람을 앞지르려는 욕망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은혜 안에서 타락한 본성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덕을 쌓아 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경쟁심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경쟁에 참여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본성을 제어하여 경쟁 체제 안에서 협력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거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학생의 경우, 시험에 대한 경쟁적 태도를 협력적 태도로 바꾸라는 뜻이다. 즉, 남을 떨어뜨리고 내가 붙자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그에 합당한 자격을 얻고자 애쓰라는 뜻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함께 응시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게 된다.


회사원의 경우, 승진을 아예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인정받고 승진해야지, 다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고 그를 넘어뜨리고 올라서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경쟁이 인간의 능력을 계발시킨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폐해가 더 크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은 경쟁을 통해서만 계발되지도 않는다. 에디슨이 경쟁심으로 그 많은 물건들을 발명해 냈는가? 미켈란젤로가 경쟁심으로 그 대작들을 남겼는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의 업적은 또 어떠한가?


놀랍게도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은 성장 과정에서 경쟁에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경쟁에서 패배한 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어냈다. 경쟁이 가장 심한 스포츠에서도 진정으로 위대한 선수는 자신의 경쟁자는 자기 자신임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경쟁심을 버리고 낮은 곳을 찾아가는 자세는 패배의식이 아니다. 공무원이 승진을 목표로 삼지 않고 봉사를 목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다. 회사원이 더 높아지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패배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깊은 차원에서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사람만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약함을 극복하는 것,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아지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주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의 능력으로 높아지려는 욕구를 버리고 섬기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제5부 세상을 바꾸는 참된 힘

“힘에 대한 항구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는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본성인데, 그것은 죽을 때에나 끝이 난다.” 토마스 홉스가 인간의 권력 지향성에 대해 간파한 말이다. 실로 인간 행동의 동기를 깊이 캐고 들어가면 결국 ‘힘에 대한 욕구’라는 최종적인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할 참된 힘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인간 실존의 핵심을 묻는 질문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빽’ 혹은 ‘줄’이 중요했다. 혈연이나 지연이 없는 사람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돈으로 더 강한 힘을 끌어댔다. 이것은 줄 대기라는 악순환을 만들어 내고, 이 틈새에서 부정부패가 무럭무럭 자랐다. 일단 승리해서 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은폐할 수 있으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힘을 추구하고 줄 대기에 참여해 왔다는 점이다. 지난 몇 년 간 부정부패로 적발된 고위 공직자들 가운데 소위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았는가? 부정한 운영으로 소요에 휘말린 학교 재단 가운데 소위 ‘기독교 재단’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원치 않으시며, 그것을 위해 부정한 술수를 동원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그분의 제자답게 행동하기를 원하신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이르러서는 그 부패의 사슬이 끊어지기를 원하신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섬기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여 힘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고 부정의 올무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다.


최근 한국 교회의 ‘권력 지향성’은 우려할 만한 상황에 이르렀다. 권력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면 그 권력으로 주의 사업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고, 돈 많은 사람을 인도하면 그 돈으로 더 능력 있게 일할 수 있다는 주장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영향력이 큰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면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으며, 그들을 전도함으로 이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워진 아랫물을 붙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먼저 윗물을 맑게 하자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부단히 높아지고 강해지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논리가 진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윗물을 맑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설사 윗물을 맑게 하여 아랫물을 더 빨리 그리고 더 쉽게 정화시킬 수 있다 해도, 그 결과로 우리는 교만의 함정에 빠진다.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돈이나 권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치 않으신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건강하게 하려면 뿌리부터 견고하게 해야 한다. 높은 데를 쳐다보지 말고 낮은 곳을 보아야 한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나무 전체가 건강해지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높은 사람’보다는 ‘낮은 사람’에게 더 공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주님은 낮은 데로 임하셔서 낮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셨다. 마땅히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 요한계시록은 전통적으로 패권주의적 기독교가 가장 애용하는 책이다. 그리스도인의 최후 승리와 악한 자들의 혹독한 징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인들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불의한 자들에게 임한다. 돈과 권력을 손에 쥔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전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대리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십자군 전쟁을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 전쟁은 이런 전투적 열심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잘못 읽은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대신해 칼을 들어 악한 자들을 징벌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다. 그분은 로마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당하셨다. 하지만 그 무력함 때문에 그분은 참된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으셨다. 우리 주님은 죽임을 당하심으로 살림을 받으셨고, 낮아짐으로 높아지셨고, 무력해짐으로 참된 힘을 받으셨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난도 당하고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역설적 존재다. 무력함 속에서 참된 힘을 드러내고 죽음 가운데서 참된 생명을 드러내며 낮은 데 처함으로 진정으로 높은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대단한 역설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역설을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통하는 힘의 논리에 속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적인 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히 힘의 유혹을 거부하고 무력한 쪽을 택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함’은 인자하고 친절한 태도라기보다는 인간적인 힘에 호소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지는 편, 손해 보는 편, 밀려나는 편을 택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이들이 결국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은 반길 일이다. 더 많은 힘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은 반길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좋은 성적과 업적을 내는 것은 반길 일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목적이 그렇게 설정되면, 승진과 당선과 성취를 위해 부정을 행하려는 유혹을 거부할 수 있다. 목적이 그렇게 설정되면, 승진하지 않아도, 당선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힘을 얻으려면 승진하고 당선되는 길밖에 없지만, 섬기는 길은 그 외에도 많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가 재선에 실패한 후 더 많이, 더 잘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출처 : 발의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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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빈 밀러 | 이용운 역
요단출판사

그리스도인의 삶은 너무도 내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외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놀랍도록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은 명료하고, 신학적 진리들 역시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실재는 늘 가슴의 문제입니다. 그분의 큰 사랑과 구원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자아 속에 있습니다. 오직 그 곳에서만 우리는 그분을 만납니다. 내면은 시공의 모든 법칙을 초월하여 우리 자신보다 더욱 큰 삶과 운명을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우리가 담고 있는 것은 현재의 우리 존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천국이며, 육신적 틀에 갇힌 그 모든 것들과는 달리 어떤 크기에 제한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지고지순의 위대한 목적으로 충만합니다.

최근 나는 아빌라에서 테레사와 후안 데 크루즈가 기도했던 좁고 천장이 낮은 방 앞에 서 있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방에서 그들은 내적 삶이 너무도 충만해져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해 중력을 거슬러 일어나면서 공중으로 떠올랐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실제로 공중으로 떠올랐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내적 삶을 세상의 상식적 사슬을 깰 만큼 충만하게 성장시켰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굴레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집니다. 하늘이 우리 안에 살기에, 공허한 중력은 우리를 이 땅에 묶어 둘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몹시도 컸으므로 나는 그분의 실체에 대한 증거를 보고 싶었습니다. 단 한 마디만이라도 내 귀로 직접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분의 존재를 확신할 것 같았습니다. 그분께서 일 분만이라도 자신을 보이시면 나는 분명한 증거를 갖게 되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치기어린 탐색은 믿음의 표피에 대한 탐색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효【?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 그랬습니다. 내면은 믿는 자와 그의 주님이 만나는 곳입니다. 이 작은 만남의 장소에 우리가 숙고하는 내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역설로 복잡해질 것입니다. 첫 번째는 홀로 있는 곳에 곧 임재하심이 있다는 역설입니다. 내적 침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토록 대화하고 싶어하는 내재하시는 그리스도께 귀기울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내면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마음을 비우게는 하지만 다른 것으로 채우게 하지는 못하는 그런 명상법들은 능력이 없습니다. 많은 요가 수행자들이 비로 쓸어내듯 마음을 깨끗이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비워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곧 방금 쓸어낸 것들과 똑같은 쓰레기와 번잡함으로 채워집니다. 내면은 그 청결하고 고요한 것을 주재할 누군가를 찾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때, 우리는 자신을 합당한 내적 예배로 드립니다.

두 번째 역설은 물러가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역이 더 중요하게 보이기에 묵상시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곧 행동입니다.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면서도 예수님을 잡은 내 손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마틴 루터의 자세도 그랬습니다. “나는 오늘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감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묵상은 곧 전진입니다.

세 번째 역설은 초월이 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주적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은하계를 활보하는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과의 고요한 친교를 위해 오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담기에 우리는 너무 작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려 은하계를 넘어오시는 전능자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한편 그분을 내적으로 충만하게 알아가고자 할 때 생기는 세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첫째, 더 깊이 알려는 갈망은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되어 이 세상의 필요를 간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의 추구를 내세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이 주는 고통과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미를 주려고 나설 뿐임을 세상이 알도록 힘써 도와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향기로운 예수’ 증후군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열정은 종종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어 예배를 망치며 감정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광야에 차려진, 오직 둘만을 위한 식탁과 같습니다. 내면은 화려한 잔치가 아니라 우리 가슴의 외로운 사막에 있는 연인들의 만남입니다. 오직 둘만의 삶과 교제가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함께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 침묵하는 중에도 우리는 밀접히 하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그분의 완전한 존재가 우리와 하나될 때까지 우리는 완전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2. 내적 여행의 장애들

진공은 어떤 물질이든 무한으로 끌어들이는 감압된 공간입니다. 사람의 영이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이 공간은 가까이 있는 것은 뭐든 끌어들여 자신을 채웁니다. 거의 잡동사니 그릇과 같습니다. 우주에는 무엇이든 비어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어떤 세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려깊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그것을 잡동사니로라도 채워놓게 됩니다.

영적인 내면성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을 말합니다. 우리의 굶주림은 어떤 무리에 속한 것만 가지고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그분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배고픔으로 인해 광야의 식탁을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웃고, 울며, 감정을 쏟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나러 나옵니다. 주님은 “내 앞에 상을 베푸시고...”(시 23:5) 그 식탁에는 오직 두 개의 의자만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기쁨으로 먹고 마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들이 우리를 대항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엄청난 공포와 공격 가운데서도 최고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무서운 적 못지 않게 그 식탁에 위협적인 또 다른 전쟁이 맹위를 떨칩니다. 이것은 죄와 싸우는 우리의 내적 전쟁입니다. 분명 내적 투쟁은 대단히 힘겹습니다. 그러나 배울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훈련은 그리스도의 내적 통치의 문제입니다. 죄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다만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저급한 성품은 예배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율법주의도 우리 죄를 제약하기보다는 죄를 정의하고 우리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리게 하는데, 예배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죄에 대한 모든 관심을 내려 놓게 합니다.

특히 서구에서는 회심 이전의 본성은 성, 음식, 권력, 조급증 등에서 이중 위험을 나타납니다. 이 젊은 사자들은 그분의 형상을 따르려는 우리의 소망에 대고 포효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초대자의 기쁨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들의 포효 앞에서 우리 마음을 굳게 할 때에만 식탁은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둘이서만 앉게 되며, 늘 그분 안에서만 사는 삶을 열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면 초대자께서는 우리 사랑을 느낍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열망이 우리를 거듭거듭 그 식탁으로 데려올 것을 압니다. 내 모든 인생길마다 그 식탁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다함 없는 존전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6).

3. 바늘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늘귀를 지나는 유일한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이기적인 짐들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그 바늘귀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맞는 유일한 문입니다. 식탁의 기쁨을 알려면 우리는 날마다 포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늘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두 나라를 섬기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재산을 거부하지 않고 경건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본성 자체에 대한 것 같습니다. 욕망이 우리 안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큰지요! 소비세계에서는 내면을 갈망하는 것만으로도 광신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이른바 보편적 가치라는 것을 무시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성 프란시스의 회심을 둘러싼 다양한 전승들이 있습니다. 제피렐리의 영화 <브라더 선 시스터 문(Brother Sun, Sister Moon)>에서 프란시스는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거절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란시스는 아버지가 준 비싼 옷들을 아시시의 광장에 벗어 놓고 나체의 몸으로 버림받은 문둥병자와 가난한 자들이 살고 있는 햇빛 가득한 들판으로 향했습니다. 프란시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가진 것에 대한 당혹감으로 얼굴을 돌립니다.

그러나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소유는 우리를 지체 높은 괴물로 만드는 일종의 독입니다. 극소량만으로도 우리보다 적게 가진 사람보다 우리가 더 잘났다고 믿게 만듭니다. 우리의 초대자는 늘 소유보다 본질을 더 강조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가난이 문제입니다. 그분의 내적 임재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재산이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배와 사업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너무 좋아해서 포기의 대가는 전혀 자각하지 않은 채 옛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경배의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각하며 하는 포기는 단순한 금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경이로움에 매혹되기만 하면 포기는 헌신의 필요조건이라기보다 부산물이 될 것입니다.

그분의 손님으로서 우리는 예전의 이기적 삶에서 돌아서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초대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외에는 어떤 야심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늘귀를 지나 그 외로운 식탁에서 우리의 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우리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것으로는 자신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 그분의 손길이 구현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르게 놓일 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의 친밀한 친구라 표현하십니다. 둘이 앉은 그 식탁에서 우리를 마주 보시며 온화하게 웃으십니다. 그리고 그 웃음은 이런 말씀인 듯합니다. “나는 바늘귀를 통해 너를 데려왔노라. 네가 신실하였으니 많은 것을 다스리게 하리라.”

4. 식탁의 그리스도

식탁에서 하나님은 번쩍이는 보좌에 높이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을 역겨워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되려고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었을 때 그분은 사람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값진 것이라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그분의 일체성을 기뻐하지 않고서는 광야의 식탁에서 결코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식탁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물론 단순한 인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너무 생생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실체의 계시자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 중의 하나로 바라보면서 우리를 초월하여 놓여진 모든 신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구세주는 영원한 세계의 실체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은 “나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우리를 시간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또한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는 사람들에게 다음 세계의 실체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언젠가 헬렌 켈러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참 실체라고 말했습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아야만 알 수 있는 영광스러운 실체를 알고 있습니다.

식탁의 그리스도는 그분의 완전하심을 통해 불완전한 우리 자신을 상기시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분의 완전한 존재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을 바라봅니다. 그분의 위로의 손길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그 앞에 나갑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 안에 그분과 같이 되려는 갈망을 심어주십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그분을 만날 때 ‘우리는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그 식탁에 계속 오면서 나는 나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겸손해졌습니다. 나는 나의 부족한 상태 그대로 사랑받았고, 완전해지기를 고대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호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식탁에서 우리의 초대자에 대하여 참 많이 배웁니다. 우리는 그분의 연민에 대해 배웁니다. 그분께서 식탁에서 신비로운 은혜로 모두를 돌보는 동안 그분의 온 사랑과 권능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집중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뢰를 배웁니다. 우리가 언제 그 식탁으로 피하든 그분께서 항상 거기에 계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급히 사라지는 것은 우리들이지 그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며 버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분과 아버지의 굳고 완전한 관계를 배웁니다. 그 식탁에서 우리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임을 배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믿음은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신뢰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심지어 골고다의 고난도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헌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결코 홀로 걷지 않는 것처럼 식탁에도 혼자 오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그분은 식탁에 아버지를 모십니다. 이제 우리는 권능의 비밀을 압니다. 우리도 지속되는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에 버려진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지옥이 우리 주위에 펼쳐 있어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5. 기도, 그 식탁의 교제

광야의 식탁에는 빵 한 덩어리뿐입니다. 식탁에 놓인 빵은 하나되는 영적 교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됨은 두 열망에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열망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열망입니다. 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참 경건을 아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십자가의 산물이기에 우리는 이 교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망설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 하나되는 교제의 기쁨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분리의 담도 무너져서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됨을 추구하는 기도는 사실 그 자체로는 힘들지 않지만 기도하고자 마음 먹는 것은 어렵습니다. 기도보다는 다른 형태의 대화를 선호하고, 사실 그게 너무 지나쳐 잠시나마 침묵의 시간을 갖기조차 힘든 지경입니다. 또한 우리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기도는 간구입니다. 그러나 간구의 위험은 이기심입니다. 긴급한 간구는 대체로 본능적인 이기주의에서 유래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는 흔히 하나님을 상자 속에 가두고 그분을 우리의 편협한 의지와 경건의 포로로 만듭니다. 사실 그분의 전체적인 계획은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게 기도하더라도 우리 뜻에 의해 바뀌지는 않습니다.

간구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셨던 위대한 기도로 끝나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게 해 달라는 간구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마지막 결정은 자신의 소망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아들의 삶을 통해 두 분의 뜻을 모아 세상을 구하려는 큰 계획이 있었습니다. 두 분의 뜻이 만났는데 그 어떤 간구인들 불가능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의 뜻이 아버지의 계획에 순복되었다는 사실은 두 분이 하나임을 증거합니다.

여기에 간구의 세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사랑의 아버지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구할 때 티끌만큼의 거리낌도 없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보다 높은 뜻에 따라 보류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 기도의 궁극적 동기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뭔가를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럼없는 간구로서 아버지께 가까이 가 이것저것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어쩌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분의 대답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셔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므로 그분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식탁의 친밀감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는 기쁨입니다. 그분과의 사귐에 잠긴 신자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큰 은혜를 경험하는 줄 의식하지 못합니다. 큰 집회에서 기도할 때에는 연합이 아니라 감정에 매달리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으로 연합되는 순간 두려움으로 떨게 됩니다. 신성과의 친밀이 우리를 무섭게 합니다. 그러나 광야의 침묵이 우리 두려움을 없애고,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듣는 기도는 관계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침묵을 듣고, 침묵에 소리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침묵입니다. 듣는 중에 우리의 내적 모순들이 해결됩니다. 우리의 엉킨 심리는 풀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말없는 신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프랑크 라우바흐는 발전기와 전기장치가 완공되었는데도 단 하나의 전구도 켜 있지 않은 거대한 댐을 보았습니다. 왜 발전기들이 돌아가지 않는지 묻자 수문이 잠겼다는 것입니다. 전능자께서도 우리의 수문이 열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침묵은 그분께서 들어오는 문입니다.

일단 내적 침묵을 실천하면 우리 앞에 하나의 원리가 더 놓여집니다. 이 원리를 통해 우리는 듣는 방법을 하나 더 배우는데, 곧 우리 주변 세계의 ‘그리스도화’라는 원리입니다. 그리스도화는 우리 삶 속에 있는 사람과 상황을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건도 이런 식으로 보면 우주적이 됩니다. 내 세계의 그리스도화는 주위의 걱정스럽고 급하며 찌푸린 얼굴에 구주의 얼굴을 그리는 일입니다. 또한 가장 복잡한 상황들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글자를 새겨 넣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새겨지자마자 복잡한 상황들은 의미와 생명을 낳습니다.

6. 순종의 기술

우리는 숨은 곳에서 나와 그분 앞에 우리 자신을 열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여는 것은 그분과 함께 기꺼이 우리 자신을 보려는 마음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악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를 슬퍼하며 하나님과 함께 내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인 여기서 우리는 그가 우리를 깨끗이 해주실 것을 기다리며 그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순종하여 완전함의 권위를 얻었습니다. 승리의 왕관은 순종의 금으로 정련되는 것을 그의 삶이 명백히 증거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도 기꺼이 그의 뜻을 이루려는 우리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한 명령에 순종할 때, 그는 그를 섬기려는 우리의 내적 보좌에서 다스리시고, 그가 거기 계실 때까지 우리 삶이 내적으로 넓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 결국 생명까지 잃게 된 어떤 병으로 고생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처음 병을 진단받고서 그는 영원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목사들처럼 그는 교회 행정과 교인들 일에 그의 삶 대부분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 동안 그는 ‘하나님의 것’들로부터 물러나와 ‘하나님 자신’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같이 되려는 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제 치유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죽으면서까지 우리와 하나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죽으면서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사형 집행인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을 신실하게 따르면서 그분은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 주님, 왕국, 성경 공부, 사역 등은 죽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순종 가운데 그런 단어들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 이상으로 채워집니다. 순종은 한 소망으로 묶인 두 마음의 축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러운 일체감을 알고 있습니다. 그 식탁의 교제는 우리 것입니다. 먹고 싶을 때마다 올 수 있지만 먹을 사람은 순종을 기억해야 합니다.

7. 그리스도와의 폭넓은 교제

영적인 세계를 향한 한 문이 열립니다. 상상력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는 우리 감각의 문턱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식탁의 그리스도를 창조합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구세주와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못박힌 손이 사랑하시는 온 세상과 나를 향하는 것을 봅니다. 상상은 회개의 낮은 제단에서 일어나 믿음의 높은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우리는 결코 큰 바다를 알 수 없지만 단 한방울의 바닷물로도 바다의 모든 요소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가 숨겨져 있는 동안 그분은 자신을 유한하게 계시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계를 초월하여 그 자신으로 모든 생명을 채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는 신령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몸과 마음의 틈을 채우시므로 삶의 모든 면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넓혀감에 따라 우리의 세계도 변할 것입니다. 적절한 대답과 엄격한 판별은 이제 내 마음의 갈증을 채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처음 알았을 때는 지금보다 모든 것이 더 분명했습니다. 그 때는 나이도 어렸고 읽은 것도 거의 없었으며, 배우지 않은 세계의 명료한 지식에 맞설 책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나는 답은 언제나 더디게 오며,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과 관계에 대한 내 판단을 명확히 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장을 통하여 나는 언제나 어떤 것의 전부를 알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분명한 답이 없어도 질문들에 좀더 귀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늘 그분 안에 있지만 또 늘 그분께 갑니다. 우리는 그분의 광대함 속에서 걷지만 그분께서 식탁 같은 작은 공간에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분임을 알면서도 그분을 찾아 식탁으로 갑니다.

시편 139편의 하나님은 행진과 시장과 광야의 하나님입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하나님을 단지 예배나 어떤 조용한 골방에서만 만났습니다. 얼마나 잘못했는지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보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거리에서 사셨습니다.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어울려 담소하고 포도주를 마셨으며, 만찬에서는 사랑했던 죄인들과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러한 행진 가운데서도 구주는 여전히 길 잃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리하여 모든 행진은 성화됩니다. 또한 시장에서도 그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업이라는 공간 역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광야의 식탁은 은유가 아니라 실재입니다. 자연의 깊은 곳에서 홀로 그분을 만나는 때보다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각각의 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울려 퍼질 때까지 노래될 것입니다. 강가의 싯다르타처럼 나는 나를 보시며 채우시는 하나님을 알고 느낍니다.

나는 이제 광야의 식탁에 있는 위대한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 식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이며, 그 외의 모든 곳에서는 그 사랑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 친밀한 광야는 확장될 것입니다. 모든 행진과 시장과 자연 자체가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고 그분의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실체를 기쁨으로 모실 때까지 확장될 것입니다.

8. 영원

영원은 그것이 지옥이든 천국이든, 항상 지금 시작합니다. 지옥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천국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그분과 나누는 관계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식탁은 계속되는 관계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열중하여 우리의 놀라운 다음 정착지를 꿈꾸며 그분과 걷습니다. 계속되는 구주와의 교제에서 우리는 삶의 경계를 기쁘게 예상합니다. 우리가 회심하던 날 얻은 내적 임재는 이 소망을 확고하게 합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궁극적 대답입니다. 죽음은 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삶과의 마지막 고별이 영광으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전염병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해안을 휩쓸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감염될까 두려워 시신 수습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파라볼라니(교부시대에 자발적으로 병자를 돌보고 장사지내던 한 형제단의 회원들)라고 알려진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했습니다. 그들은 신자와 주님의 영원한 연합에는 사망의 쏘는 것이 없는 것을 알고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시간은 짧지만 중요합니다. 성서는 어디서나 우리는 삶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토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안한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우리의 삶과 하루에 대해 오래 묵상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향하는 만큼이나 분명히 영원을 향하게 되어 있으며, 지각 있는 도덕적 존재로서 시간과 영원 둘 다와 마주해야 합니다.”

식탁의 교제는 우리 생애의 청지기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광야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신성한 교제의 골방을 떠나야 할 때 사랑하는 성령은 삶의 온갖 상황과 분투에서 매일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바로 그 보혜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것도 가능하게 합니다. 마침내 우리의 초대자가 식탁에서 일어나는 날, 우리도 일어나 그분의 아버지가 계신 종착지로 함께 걸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승리에 있어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 교제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 식탁에서 해온 것처럼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천국문은 좁은 문으로 폐쇄된 수도원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좌로 나란히 걷는 열린 에덴 동산입니다. 그리스도와 사귀며 사는 우리는 이 마지막 시간에 홀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가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구주와 나눈 모든 기쁨은 하늘에서 영원한 하나로 승화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의 식사는 고요합니다. 우리의 초대자는 우리 마음의 중심, 고요한 식탁에 함께 앉습니다.

출처 : 발의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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